삼성전자의 사운이 TV에 달려 있다. 인재와 기술을 모두 모아 사활을 걸고 TV를 만들라.”

이건희 삼성 회장이 2004년 내린 특별 지시다. 곧바로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 직원 300여명이 TV사업부로 투입됐다. 이 회장은 “아날로그 시대에는 출발이 늦었지만, 디지털 시대는 출발선이 같아 우리도 1등을 할 수 있다”고 임직원들을 독려했다.

하지만 반도체사업부에서 하루 아침에 TV부서로 내몰린 직원들의 생각은 달랐다. 2류 취급도 못 받던 삼성 TV를 1등으로 만들라는 지시를 ‘불가능한 일’로 여긴 것. ‘TV 지존’ 소니를 단숨에 넘어서는 것은 꿈꾸기 힘든 일이라고 판단했다. 소니 TV가 100만원에 팔린 반면, 삼성 TV는 68만원가량 하던 시절이었다.

[BIZ Insight] OLED 혁명…삼성전자, 세계 TV역사 새로 쓴다

○디자인 혁신으로 시장 판도 뒤엎어

비관주의를 극복하고 삼성 TV를 일류로 만들어야 하는 중책을 맡은 사람은 최지성 삼성전자 부회장. 당시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총괄 부사장이었던 최 부회장은 곧바로 차기 프로젝션 TV(L7) 디자인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무난한 사각형 박스 모양과 원통에 벽걸이TV를 걸어놓은 듯한 파격적인 디자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내부에선 “후발 업체로서 원통 모양 TV는 아직 위험하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하지만 최 부회장은 튀는 원통형을 차기 제품으로 낙점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L7은 삼성만의 독자적인 브랜드를 전 세계에 알려 수익을 낸 첫 대형 TV가 됐다. 다음해엔 ‘TV는 사각형’이라는 고정관념의 틀을 깨고 오각형 TV ‘로마’를 선보였다. 상표만 떼면 어떤 회사 TV인지 알 수 없던 때에 오각형 TV는 삼성만의 존재감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이어 차기작인 ‘밀라노’와 ‘피렌체’에서 외부에 노출되던 스피커를 안으로 넣은 디자인으로 다시 한 번 시장을 놀라게 했다.

삼성의 파격 디자인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와인잔 모양의 TV로 다시 한 번 디자인 매너리즘을 깨뜨린 것. 삼성의 한 디자이너가 와인을 마시다 “와인잔 괜찮겠다”고 무심코 내뱉은 말이 모티브였다. 삼성 TV 역사를 새롭게 쓴 ‘보르도 TV’는 이렇게 탄생했다. 이 제품 덕에 삼성은 2006년 사상 처음으로 소니를 누르고 세계 TV 시장 1위에 올랐다. 1969년 삼성산요전기라는 합작사를 설립, TV사업에 뛰어든 지 37년 만의 일이었다.

○끊임없는 도전·기술 혁신으로 1등 유지

2008년 4월 삼성전자 수원사업장 회의실. 당시 삼성 TV사업을 총괄한 윤부근 소비자가전(CE) 담당 사장은 차기 TV 모델을 놓고 임원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윤 사장은 ‘보르도 신화’를 이어갈 주역으로 LED(발광다이오드) TV를 지목했다. 동시에 LED TV의 풀 라인업을 구축하자는 승부수를 던졌다.

상당수 임원들이 “지나치게 앞서가다 되레 실패할 수도 있다”고 제동을 걸었지만 윤 사장은 요지부동이었다. “삼성이 만들면 시장이 창출될 수 있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었다.

곧바로 연구원들은 제대로 된 벽걸이 TV를 만들기 위해 94㎜였던 LED TV 두께를 4분의 1 수준으로 줄이는 작업에 착수했다. 상품기획팀은 “액자처럼 걸 수 있게 TV 두께를 1인치로 끊어달라”고 요구했고, 개발자들은 “손가락 굵기는 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두께를 줄이기 위해 LED 백라이트를 화면 뒤쪽 전체에 배치하지 않고 테두리에만 붙이는 ‘엣지형’ 기술을 채택했다. 열을 발생시키는 영상보드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 엣지형의 고질적 문제점인 발열 문제도 해결했다. 얇은 패널에서 발생할 수 있는 뒤틀림 현상을 막기 위해 알루미늄 패널을 압축해 강도를 높였다.

이런 난제들을 극복한 덕분에 2009년 볼펜보다 얇은 20㎜대 초슬림 LED TV가 탄생할 수 있었다. LED TV는 출시 초기부터 승승장구했다. 프리미엄 제품군인 6000 및 7000 시리즈는 북미, 유럽, 중국,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출시 50일 만에 20만대가 팔렸다. 2008년 전체 LED TV 판매량인 19만대를 두 달도 안돼 넘어선 것이다.

LED TV 판매량 급증에 힘입어 삼성전자는 2006년 이후 6년 연속 세계 TV 시장에서 1위를 질주하고 있다. 시장 점유율도 상승하고 있다. 2010년 23.3%, 2011년 26.6%였던 점유율은 지난 1분기에 30.2%로 높아졌다. 지난 4월 북미 시장에선 40.1%를 기록하며 ‘마의 벽’으로 간주되던 40%대를 돌파했다. 윤 사장은 “점유율 40%는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으로 불렸는데 삼성이 전자업계에서 처음으로 그 벽을 넘었다”고 말했다.

○OLED TV·대형 스마트TV로 시장 주도

삼성전자는 “TV에서 아직 보여줄 게 많이 남았다”고 공언하고 있다. 우선 스마트TV가 간판타자 역할을 하고 있다. 올해 선보인 스마트TV ‘ES8000’은 ‘보는 TV’에서 ‘즐기는 TV’로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인터넷 검색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이용은 기본이고 PC와 스마트폰에 저장된 콘텐츠를 TV로 즐길 수도 있다. 다양한 콘텐츠를 갖춰 TV가 여성들의 운동 파트너가 되고,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센터 역할을 하기도 한다. 삼성은 비디오와 게임, 스포츠 등 1700여개의 애플리케이션(응용프로그램)을 제공해 TV를 ‘바보상자’에서 ‘요술상자’로 격상시킨다는 전략이다.

스마트TV가 콘텐츠 혁명을 주도하고 있다면 TV 본연의 기능인 화질 혁신은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TV 몫으로 남겨뒀다. 삼성은 지난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소비자가전쇼(CES)에서 55인치 OLED TV를 선보여 ‘최고 혁신상’을 받았다. 지난달 10일에는 OLED TV 양산 모델을 세계 최초로 공개했다.

삼성은 빨강(R), 녹색(G), 파랑(B) 화소로 직접 색상을 표현하는 RGB 방식의 OLED TV를 생산할 계획이다.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SMD)는 이미 충남 아산 탕정에 구축해놓은 8세대 RGB 방식의 OLED 시험생산라인을 양산라인으로 전환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삼성디스플레이가 보유한 8세대 라인 중 일부도 OLED 생산라인으로 바꿀 방침이다.

김현석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장(부사장)은 “OLED TV와 대형 스마트TV를 앞세워 차세대 슈퍼 프리미엄 TV 시장을 주도해 경쟁사가 따라올 수 없는 ‘초격차 전략’을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정인설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