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구성하고 있는 4개의 큰 섬 가운데 한국과 가장 가까운 규슈. 부산에서 남쪽으로 200㎞ 떨어진 이 섬에 지난 3월 올레길이 생겼다. 규슈의 민관합동 조직인 규슈관광기구가 ‘제주 올레’를 수입해 1차로 개통한 ‘규슈올레’ 4개 코스다.


이들 코스를 차례로 걸었다. 프랜차이즈가 대체로 그렇지만 규슈올레는 제주올레와 너무나 닮았다. 섬이라는 기본 조건도 그렇고 식생도 비슷하다. 없던 길을 새로 내는 게 아니라 있는 길을 최대한 활용하고 점을 선으로 연결하는 방식도 같다. 프랜차이즈가 그런 것처럼 간세 표지판과 사람 인(人)자를 활용한 나무화살표도 똑같다. 올레 리본 중 주황색만 일본 신사 입구의 도리(문) 색깔(주홍색)로 바꿨다.

숲을 걷다 바다를 만나고, 마을길을 걷다 주민들과 인사를 나누는 기쁨이 특별하다. 모내기를 막 끝낸 논, 양파를 수확하는 농민들, 바다에 점점이 떠 있는 섬과 어촌의 고즈넉한 풍경에서 규슈의 맨얼굴을 본다.

한국에서 오는 올레꾼을 배려해 곳곳에 붙여둔 한글 인사와 코스 안내서도 반갑다. 개통 두 달 만에 3000여명의 한국인이 다녀갔다니 인기를 짐작할 만하다.

◆걷기 편한 가고시마현 이부스키 코스

후쿠오카의 하카다역에서 신칸센으로 1시간20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가고시마중앙역. 여기서 버스를 타고 70㎞를 달려 가고시마만의 서남쪽에 있는 이부스키(指宿)시에 이르자 가고시마현관광연맹의 다나카 미즈호 부장이 마중을 나왔다. 그는 “대지진 후 급감했던 관광객이 올레 개통 후 늘고 있다”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총길이 20.5㎞인 이부스키 코스의 출발점은 일본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니시오야마(西大山)역. 역무원도 역사도 없는 무인(無人) 역이지만 일반 관광객도 많이 찾는 곳이다. 봄에는 역 주변의 유채꽃이 예쁘다는데 아쉽다. 행운의 종과 행복을 전해주는 노란 우체통이 있다. 마침 두 칸짜리 열차가 도착해 잠시 서있다 떠나며 여운을 남긴다. 작은 가게를 겸한 관광안내소에서 최남단역 도착 증명서를 팔고 자전거도 빌려준다.

이부스키 코스는 ‘사츠마(가고시마의 옛이름)의 후지산’으로 불리는 해발 924m의 가이몬다케(開聞岳)를 중심으로 그 둘레를 도는 게 특징이다. 수박, 담배, 고구마 등이 한창 자라고 있는 밭길을 지나 나가사키바나(長崎鼻)곶에 도착하니 하얀등대가 마중한다. 등대 가까운 곳에 심청전류의 용궁전설(우라시마타로)로 유명한 신사가 있다. 한 어부가 바다거북을 따라 용궁에 가서 며칠 지내다 왔더니 하루가 10년처럼 갔더라는 이야기다.

◆울창한 숲길 끝자락에 '빨래판' 해변…규슈 최대 마애석불 지나니 '작은 교토'가…

나가사키바나에서 검은모래 해변을 걷노라니 삼각형 또는 원추형의 가이몬다케가 점점 다가온다. 길은 솔숲으로 이어지고 숲이 끝나는 곳에 가와지리 포구가 작은 어촌마을의 정취를 간직하고 있다. 가이몬다케 산록의 허브농원을 지나자 모내기를 막 끝낸 논에 비친 가이몬다케의 그림자가 아름답다.

논 옆에는 풍작과 다산을 기원하는 돌인형 다노간사가 서 있는데 제주도의 돌하루방과 많이 닮았다. 가이몬다케를 거울처럼 비춘다는 가가미이케(鏡池)에선 시간이 맞지 않아 가이몬다케를 볼 수 없었지만 코스의 종점인 가이몬역에 이르자 또다시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이부스키 코스는 대부분 평지여서 걷기에 편하다. 5~6시간이면 걸을 수 있다. 동행한 제주올레 걷기축제의 정도연 감독은 “이부스키는 서귀포와 지형이나 식생, 분위기가 너무나 닮았다”며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이나 여성도 무리 없이 걸을 수 있는 코스”라고 말했다.

규슈올레는 하루에 한 코스씩 걷기에 좋다. 오전에 걷고 오후엔 다른 코스가 있는 지역으로 이동하면 된다. 이브스키 코스로 몸을 푼 뒤 규슈 섬의 중서부에 있는 구마모토로 향했다.

◆구마모토현 아마쿠사·이와지마 코스

구마모토현의 올레길은 많은 섬들로 이뤄진 아마쿠사(天草)제도의 이와지마섬을 일주하는 코스다. 아마쿠사 제도에는 120여개의 섬이 있는데 큰 섬들을 연결하는 5개의 다리인 아마쿠사코교 중 1교를 건너면 가미아마쿠사다. 여기서 바다 위를 걷는 느낌의 히가시오이바시 다리를 건너 이와지마섬으로 들어간다.

아마쿠사제도는 에도시대였던 1637년 ‘아마쿠사·시마바라의 난’을 일으킨 아마쿠사시로(天草四郞)에서 유래한 이름이다.천주교 박해와 핍박받던 농민들의 가슴 아픈 역사가 서린 곳이다.

이와지마 섬에는 선사시대 유적인 센자키 고분군이 있는데 여기가 올레의 출발점이다. 길에서 야트막한 언덕으로 오르자 곧바로 인골을 담았던 석관 20여개가 부서진 채 여기저기 눈에 띈다.

고분군을 지나 바다쪽으로 내려오면 작은 어촌마을인 조조(藏藏)항이 있다. 해발 166m의 다카야마(高山) 정상에 오르자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을 사방으로 조망할 수 있는 경관이 시원하다.

산 정상에서 울창한 숲길을 따라 내려가니 바다 냄새가 나는 듯하다. 왕대숲이 동굴처럼 좌우에 울창한 길이 끝나는 지점은, 뜻밖에도 바다다.

이곳이 바로 8500만년 전에 형성된 단층지대가 빨래판처럼 바닥을 만들어놓은 소토우라해안인데, 이런 ‘빨래판 해변’이 2㎞나 계속된다고 한다. 빨래판 해안을 걷다 다시 숲길, 산길을 걷다 하산하면 시모야마 마을. 여기서 신사인 센조쿠 천만궁(千束天滿宮)까지 걸어가니 12.3㎞의 올레길이 끝났다.

◆오이타현 오쿠분고 코스

오이타현은 규슈섬의 동쪽 중간쯤에 있다. 구마모토에서 연간 1000만명이 방문한다는 거대한 아소산 국립공원 지역을 지나 오이타현으로 들어섰다. 오쿠분고 코스는 오이타현의 분고오노(豊後大野)시의 JR(일본철도) 아사지(朝地)역에서 다케다(竹田)시의 성 아래 마을까지 걷는 11.8㎞의 코스다.

아사지역을 지나 첫 번째 만난 것은 영주의 정원이었던 유자쿠(用作)공원. 공원의 돌담을 잘라 낸 동쪽문으로 들어서자 신록으로 뒤덮인 단풍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감탄을 자아낸다. 봄에는 벚꽃, 가을엔 500그루의 단풍이 절경을 연출한다는데 이 계절에 봐도 좋기만 하다. 규슈 최대의 마애석불이 있는 후코지(普光寺)로 향한다.

후코지는 법당 외엔 별다른 건물도 없는 작은 절이지만 음악을 좋아하는 주지 스님이 법당에 피아노를 갖다 놓고 여행자들이 연주하도록 한다. 일행 중 한 명이 피아노를 연주하자 법당과 계곡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마애불로 안내한다.

높이 11.3m의 거대한 마애불 옆에는 석굴법당이 있는데 이곳의 누각으로 일행을 안내한 주지 스님은 전자피아노 연주에 맞춰 직접 노래까지 불러보였다. 후코지에서 나오니 공동작업을 하고 있던 마을주민들이 점심으로 준비한 야키소바를 대접하며 환대했다. 이런 게 여행의 묘미 아닐까.

소가와 주상절리를 지나 한참을 더 가니 오카(岡城) 산성터에 닿는다. 오카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였지만 지금은 돌담만 남은 성벽에 돌이끼마저 가득해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준다.

유명한 작곡가였던 타키 렌타로의 명곡 ‘황성의 달’이 오카성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졌다고 한다. 성 위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이 압권이다. 규슈의 연산과 소보산, 아소산이 먼 풍경으로 보이고 신록으로 옷을 갈아입은 숲은 파스텔화같다.

오카성 주차장으로 내려오면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매표소가 있다. 여기서 더 내려오면 작은 교토라고 불리는 다케다시의 작은 마을이 기다린다.

400년 전 지었다는 간조인아이엔당에는 사랑을 기원하면 이뤄진다는 애염당(愛染堂)이 있는데 시계 반대 방향으로 법당을 세 번 돌면 소원을 들어준다고 한다. 오쿠분고 코스의 종착점인 분고다케타역에는 다케타 온천과 무료 족탕이 있다. 역 주변에는 기념품점을 비롯한 가게들이 많다.


◆걷고 온천도 하고…사가현 다케오 코스

사가현의 다케오 코스(14.5㎞)는 후쿠오카에서 열차나 차로 한 시간 거리여서 접근성이 가장 좋다. 게다가 사방을 둘러싼 산들 속에 고요히 자리잡은 온천마을로 유명해 걷기와 온천욕을 함께 즐길 수 있다.

올레길은 다케오온천역에서 시작한다. 도심을 가로지르면 시라이와 운동공원. 여기서 1.8㎞의 숲길을 따라 다케오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공원의 언덕으로 오른다.

언덕 정상에서 내려가노라니 ‘기묘지(貴明寺)’라는 사찰이 있다. 선종을 표방하는 임제종 사찰인데 학교 선생님을 하다 가업으로 절을 물려받은 주지 토키 고신(土岐弘親)스님과 부인이 올레꾼들에게 차를 대접한다. 주지 스님은 올레꾼들에게 참선체험을 해보라며 법당으로 안내한 뒤 참선하는 방법을 일러준다.

기묘지를 지나면 이케노우치 호수로 길이 연결된다. 호텔과 펜션 등이 있는 호변길을 따라 걷다 사가현 우주과학관 앞에서 길이 갈라진다. A코스는 가파른 산길을 통과해야 하는 상급자용, B코스는 거대한 분지 안에 오밀조밀 모인 다케오시의 풍경을 즐기는 노약자용이다.

A코스를 선택했다. 산그늘이 거울처럼 비치는 연못 두 개를 지나자 길은 가팔라지고 그만큼 겹겹이 겹쳐진 산악지형의 멋진 풍광을 선물로 받게 된다. 경사가 심해 밧줄을 잡고 내려와야 하는 구간도 있지만 위험할 정도는 아니다.


다케오시문화회관을 지나 다케오신사로 들어선다. 신사를 지나 뒤편의 숲으로 들어서니 빽빽한 대숲을 지나 사람들에게 신비한 힘을 준다는 수령 3000년의 거대한 녹나무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신사를 나와 5분쯤 걸으면 또 하나의 녹나무 고목인 츠카사키 녹나무가 있다. 작은 산 곳곳에 수많은 불상들이 숨어있는 사쿠라야마공원을 지나 다케오온천에 이르면 온천누문이 올레길의 종점이다. 수질이 좋기로 유명한 다케오온천에서 몸을 담그니 이 순간이 바로 천국이다.

사가=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