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인물] 비스마르크 "아내를 다시 만나게 해주소서"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경제와 문화의 가교 한경
“현실의 큰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이 아닌 철과 피에 의해 결정된다.”
40여개 공국(公國)과 자치시로 쪼개졌던 독일을 연방국가로 통일한 ‘철혈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 그는 1815년 프로이센 융커(지방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20대까진 이른바 ‘방탕아’였다. 싸움질과 술에 젖어 살았으며, 대학에서도 제적됐다. 그는 1847년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요한나를 아내로 맞으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법관시보를 거쳐 정치에 입문했다. 1859년부터 3년간 러시아와 프랑스 대사를 거치며 외교관 역량도 쌓았다.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과 전쟁을 치르며 ‘철혈정책의 대명사’로 굳어졌지만 비스마르크는 철저한 현실정치가였다. 141년 전(1871년) 오늘 통일 독일의 첫 총리에 오른 그는 외교 정책에선 안보, 국내 정책에선 사회안정에 초점을 맞췄다. 1872년 문화투쟁을 통해 정치와 교육에서 가톨릭 세력을 몰아내고 국민교육 체계를 갖췄다. 중앙은행과 민법·상법을 만들어 자본주의 제도의 기초도 다졌다. 1878년엔 세계 처음으로 의료 산업재해 등 사회보장 제도도 도입했다.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준 아내에 대한 감사였을까. 그는 애처가였다. 1898년 딸들이 임종을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마지막 남긴 한마디. “(먼저 세상을 뜬) 요한나를 다시 만나게 해주소서.”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