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세계 3위 D램 업체인 일본 엘피다메모리 인수를 위한 본입찰 참여를 포기했다. 도시바에 이어 SK하이닉스가 인수전에서 빠짐에 따라 엘피다 새주인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SK하이닉스는 4일 서울 대치동 서울사무소에서 이사회를 열어 엘피다 인수건을 2시간여 논의한 뒤 “엘피다 본입찰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공시했다. 최태원 SK 회장(사진)은 이사회 직후 “전략적으로 (엘피다 인수가)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따졌는데, 지금은 유리하지 않다고 판단했다”며 인수 포기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앞으로도 좋은 기회가 있으면 인수·합병(M&A)을 검토할 것”이라며 추가로 기업 인수에 나설 것임을 내비쳤다. SK하이닉스는 지난달 30일 파산보호신청을 한 뒤 매물로 나온 엘피다 입찰에 전격 참여한 뒤 실사를 벌여왔다.

◆시너지 없는데 재무부담 커져

SK하이닉스가 인수전에서 철수한 것은 시너지가 크지 않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반도체 업계 고위 관계자는 “하이닉스가 엘피다를 왜 인수하겠나. 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미세공정 기술이 20나노급(1나노는 10억분의 1m)인 SK하이닉스가 30나노 수준의 엘피다를 인수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장점은 생산능력 증가인데 대부분 수요가 줄고 있는 PC용 D램이다.

모바일 D램 기술은 탐나지만 그 대가로 치러야 할 막대한 인수대금과 부채(6조원 이상) 등 부담이 크다. 하성민 SK텔레콤 사장은 이사회가 끝난 뒤 ‘시너지가 없어서냐’란 질문에 “그런 측면도 있다”고 답했다.

재무 리스크가 커진 점도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SK하이닉스는 재무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 도시바 등과 컨소시엄을 만드는 방안을 추진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게다가 일부 엘피다 채권단은 매각가가 1500억엔(2조1000억원) 이하라면 별도 회생방안을 법원에 내겠다고 공언해왔다. 오용태 이트레이드증권 선임연구원은 “2조원에 인수해도 설비투자까지 생각하면 4조원 이상이 드는데 그 이상을 요구한 것이니 금액 부담이 있을 것”이라며 “SK하이닉스가 어렵게 회복한 재무능력을 망가뜨릴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고 말했다.

SK는 ‘무리하게 인수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지난 1분기 실적발표 때 공표했다. 김준호 SK하이닉스 부사장은 지난달 26일 콘퍼런스콜에서 “엘피다 인수는 전략적 옵션의 하나로 검토한 것이고, 이 외에 다양한 경쟁력 강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며 “기본적으로 운영에 필요한 현금은 지속적으로 가져가야 하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만 투자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SK하이닉스는 3월 말 현재 3조4000억원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 이 돈은 대부분 올해 투자에 쓸 계획이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엘피다 입찰에 참여한 회사들이 모두 경쟁사이다 보니 실사에서 많은 정보를 얻기 어려웠다”며 “엘피다에 대한 가치 판단을 정확히 할 만한 정보와 시간도 부족했다”고 설명했다.

◆엘피다 어디로

도시바에 이어 SK하이닉스마저 입찰을 포기하면서 엘피다 인수전은 D램 4위인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와 중국 호니캐피털, 미국 TPG캐피털이 합작한 중·미 연합펀드의 2파전으로 압축된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어느 쪽이 인수해도 D램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한국 업체에 미칠 영향은 크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김영찬 신한금융투자 연구위원은 “마이크론이 인수하면 D램 시장점유율은 올라가겠지만 공정미세화 기술은 떨어져 수익성이 오히려 낮아질 수 있다”며 “마이크론이 일부 생산능력을 줄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한국 업체에 불리하지 않다”고 말했다.

중국사모펀드의 경우 일본의 정치적, 정서적 문제로 인수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업계는 예측하고 있다. 인수하게 되더라도 반도체를 알지 못하는 사모펀드가 이미 벌어진 기술 격차를 줄이기 힘들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다만 중·미 연합펀드 뒤에 중국 최대 컴퓨터제조업체인 레노버가 도사리고 있는 점은 변수다. TPG캐피털은 레노버가 2005년 미국 IBM의 PC 사업을 인수할 때 공동 출자사로 참여한 곳이며 호니캐피털은 레노버를 보유한 레전드홀딩스의 자회사다.

엘피다 매각이 결국 무산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오 연구원은 “채권단이 반발하고 기술 유출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 매각 자체가 불발될 수 있다”며 “이 경우 엘피다가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나서 D램 업황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예상했다.

강영연/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