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에 미치면 세상 모든 게 당구대와 당구공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한가지에 몰입하다 보면 모든 게 하나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심하면 눈에 헛것이 보인다.

화가들도 마찬가지다. 19세기 후반의 혁신적 화가들은 세상을 색채와 형태의 결합으로 파악하려 했다. 미국 화가 윈슬로 호머(1836~1910)도 비슷한 생각을 가졌다. 그의 눈에는 당시 인기를 끈 크로켓 놀이가 하나의 멋진 그림을 위한 소재에 불과했다. 그는 놀이보다는 녹색의 잔디밭 위에서 경기를 펼치는 여인들의 기하학적 형태와 거기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통해 빛과 색채, 형태의 조화를 표현하려 했다. 그것은 사물의 외형 뒤에 숨은 일종의 헛것이었다. 예술의 혁신은 헛것, 즉 ‘가상현실’에 대한 집착의 산물이다. 미래는 헛것을 볼 줄 아는 자에 의해 열린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