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 매니지먼트] 손용근 대표, '각하 지시'에 소신판결로 맞선 'Mr.강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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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 - 손용근 법무법인 동인 대표
스물아홉에 생모 처음 봤던 외톨이 소년
월급 받는 대학생
가정형편 탓에 서울법대 포기…한양대서 두둑한 장학금 받아
소신 있는'반골 판사'
재야인사 석방으로 낙인 찍혀 5·18 재판 땐 법정에 못 들어가
스물아홉에 생모 처음 봤던 외톨이 소년
월급 받는 대학생
가정형편 탓에 서울법대 포기…한양대서 두둑한 장학금 받아
소신 있는'반골 판사'
재야인사 석방으로 낙인 찍혀 5·18 재판 땐 법정에 못 들어가
손용근 법무법인 동인 대표는 재단법인 한국서화예술협회 초대작가를 지낼 정도로 서예와 문인화에 조예가 깊다. 판사 초년 시절 입문했으니까 벌써 30년 가까이 묵향을 벗삼아 지내온 셈이다. 지난 26일 인터뷰를 위해 찾은 강남역 인근 대표 사무실에는 직접 그렸다는 연꽃이 글귀를 배경으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이제염오(離諸染汚)’. 연꽃은 진흙속에서 자라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려움에 처한 한 청년의 변호를 맡고 있는데 수시로 쳐다보며 초심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걸어둔 것이라고 한다.
◆한양대 1호 법조인의 영욕
한양대는 손 대표에게 모교 이상의 의미가 담긴 곳이다. 그는 주저없이 “내 운명을 결정지었던 곳”이라고 표현했다. 특히 ‘한양대 1호 법조인’ 꼬리표는 그에게 영예도 안겨주었지만 십자가도 지워주었다고 한다. 검사 대신 판사의 길을 택한 것, 2005년부터 대법관 후보에 올라 번번이 고배를 마셨지만 즉각 법원을 떠나지 않은 것은 모두 “한양대에 대한 부채의식 때문이었다”고 고백했다. 작년 2월 법복을 벗으면서 ‘대학으로부터도 이제 자유다, 새출발이다’라며 해방감에 만세를 불렀을 정도. 그런데 한양대 동문들이 로펌에 일감을 가져다 주는 것을 보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임을 확인했다”고 너털웃음을 웃었다.
손 대표는 가정형편 때문에 서울법대를 포기하고 한양대행을 택했다. 법조인 배출에 목말라있던 한양대로선 광주·전남지역 예비고사에서 2등하고, 한양대를 수석입학한 그만 쳐다봤다. 대학 설립자이자 당시 총장이었던 김연준 씨도 고시반을 수시로 찾아와 “손군은 언제 합격하나”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장학금도 두둑히 탔다. 당시 9급공무원 한 달 월급이 1만3000원 할 때 그는 장학금으로 1만5000원을 받았다. ‘월급쟁이 학생’은 성원에 보답이라도 하듯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75년 17회 사법시험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1959년 정경대학 법률학과로 출범한 지 16년 만에 한양대에 첫 법조인이 탄생한 것이다. 71학번인 그가 물꼬를 트자 한 해 후배인 정동기 전 대통령 민정수석(72학번)이 사시 18회에 합격하는 등 후배 법조인들이 줄줄이 뒤를 이었다. 지금은 한양대 출신 법조인이 1200여명. 인원만 따져도 법조계 ‘빅5’로 꼽힌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손 대표는 법조계에서 외톨이였다. 대학선배가 아무도 없는 길을 혼자 개척해 나가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 법원인사에 대해선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서울법대 출신들이 독점(14명 중 13명이 서울법대 출신)하고 있는 대법관에 임명되지 않은 것이 손 대표에게 아직도 마음의 상처로 남아 있다.
딸이 서울대에 입학하던 날 손 대표는 서울대 배지를 가슴에 달고 잤는데, 이를 지켜본 아내가 “유치하다”고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손 대표는 “‘마누라조차 내 상처를 모르는구나’라고 생각하니 서글퍼지더라”며 감상에 젖어 인터뷰 도중 천장을 올려다 보기도 했다.
◆소신판결로 도망자 신세도
전두환 등 신군부가 등장한 1979년 12·12 사태 때 손 대표는 광주에서 공군 법무관으로 복무 중이었다. 얼마 뒤 광주 군법회의에 파견 나가 보니 광주 전남 재야인사들이 대거 구속돼 있었다. 법대로 무혐의 결정해 풀어준 뒤로 한동안 도망자 신세가 됐다. “저와 동향이라는 한 사병이 ‘보안대에서 잡으러 가니 빨리 도망가라’고 전화해줬어요. 제법 오랫동안 도망다녔습니다.”
법무관 말년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도중 사망한 140구가 넘는 시체의 검시를 맡았다. 그는 함께 검시에 참여한 의사들에게 “사망 원인을 어려운 한자로 써달라”고 당부했단다. 가늘고 긴 흉기에 의해 찔렸을 경우 ‘자창’(刺創)이라고 사인을 적었는데 이런 내용들이 보안대 검열을 무사통과해 언론에 그대로 보도되면서 파장을 일으켰다고 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군사재판이 있을때 손 대표가 재판부 명단에서 운좋게 빠질 수 있었던 것도 이때 ‘반골’로 찍혔기 때문이다. 서슬 퍼렇던 군사정권의 ‘각하 지시사항’도 그에겐 먹혀들지 않았다. 1985년 DJ(김대중 전 대통령) 귀국 환영벽보사건과 1986년 남부지원(현 서울 남부지방법원) 영장기각사건이 대표적이다. 일당 받고 벽보를 붙인 시골 아주머니들에게 ‘29일 구류에 처하라’는 윗선의 지시를 무시하고 3000원 과료처분했고, 건국대 연합시위사건에선 공부하다 잡혀온 학생들은 영장을 모두 기각해버렸다. 손 대표는 “정의에 대한 용기가 부족한 시대를 살아왔다”며 “꼼수에 저항하는 기질이 있어서인지 권력에 아부하지는 않았다”고 회상했다.
◆서예와 고향땅 병영은 마음의 안식처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일찍부터 맛본 그에게 서예는 마음의 안식처였다. 그는 “마음이 소란스러울 때 붓을 들면 잡념에서 해방되고, 문인화는 자기의 뜻을 표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서당에서 처음 배운 붓글씨에 지금은 “인이 박혔다”고 했다.
서예와 더불어 오늘날까지 손 대표를 이끌고 있는 또다른 정신적 지주는 고향땅 전남 강진군 병영이다. 손 대표의 호 수인(修仁)은 고향마을에 있는 수인산에서 따왔다. 손 대표는 “6·25사변이 아니었으면 이 세상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손 대표 조부는 광해군 때 전라병영 수군 만호장을 지낸 분을 파조로 한 문중의 종손이었다. 조부는 전란으로 대가 끊길 것을 염려해 12대 종손으로 당시 학생이었던 손 대표 부친을 서둘러 장가 보냈고, 그 이듬해인 1952년 손 대표가 태어났다. 그런데 서둘러 맞이한 며느리가 미워졌는지 시어머니가 새 며느리를 맞아들이면서 손 대표는 태어나자마자 얼마 안 돼 생모와 생이별했다.
생모와의 첫 대면은 그의 나이 29세 때였다. 생모가 어떻게 알았는지 그의 결혼식장을 몰래 찾아온 것이다. 부모가 모두 살아계셨지만 조부모가 부모 역할을 자처하면서 그는 부모 없는 자식같이 자랐다. 이를 빌미로 방황하며 자칫 빗나갈 수 있는 사춘기 시절 그를 붙잡아 준 것은 병영교회였다. 그는 이 교회를 ‘예비된 처소’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병영교회의 고 김성래 장로님은 손 대표가 병영상고가 아닌 광주일고로 진학해 운명을 바꾸는 데 결정적 도움을 준, 지금도 가장 존경하는 멘토다.
◆후배들에 희망 전해주고 싶어
법무법인 동인에는 작년 7월 합류했다. 국내 변호사만 65명인 이 중견 로펌을 10대 로펌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이를 위해 현재 강점을 보이는 형사부문 외에 민사부문도 강화하고, 지식재산권 분쟁이나 조세행정분야도 특화시킬 방안을 찾고 있다.
후학양성과 취업지도도 빼놓을 수 없는 그의 관심사다. 한양대는 1986년에 강의 나간 데 이어 작년부터는 석좌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다. 강의과목은 민사소송법이지만 “불안에 떨고 있는 후배들을 치유해주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 “보릿고개를 넘어온 우리가 볼 때 요즘 학생들은 단군이래 최대의 풍요를 누리고 있는데도 인생 자체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들에게 영성적인 희망을 심어주고 싶어요. 독서도 시키고 함께 어울려 밥도 같이 먹으면서 후배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김병일 기자 kbi@hankyung.com
■ 손용근 법무법인 동인 대표
출생 - 1952년 전남 강진
가족 - 부인과 1남2녀
학력 - 광주제일고, 한양대 법학과, 美컬럼비아대 법학부 연수, 한양대 법학석사, 연세대 법학박사
경력 - 17회 사법시험 합격(1975년), 서울행정법원장(2006년), 대고구등법원장(2008년), 사법연수원장(2010년), 현 ()한양대 석좌교수, (현)법무법인(유) 동인 대표변호사, 현 ()한국서화예술협회 회장
◆한양대 1호 법조인의 영욕
한양대는 손 대표에게 모교 이상의 의미가 담긴 곳이다. 그는 주저없이 “내 운명을 결정지었던 곳”이라고 표현했다. 특히 ‘한양대 1호 법조인’ 꼬리표는 그에게 영예도 안겨주었지만 십자가도 지워주었다고 한다. 검사 대신 판사의 길을 택한 것, 2005년부터 대법관 후보에 올라 번번이 고배를 마셨지만 즉각 법원을 떠나지 않은 것은 모두 “한양대에 대한 부채의식 때문이었다”고 고백했다. 작년 2월 법복을 벗으면서 ‘대학으로부터도 이제 자유다, 새출발이다’라며 해방감에 만세를 불렀을 정도. 그런데 한양대 동문들이 로펌에 일감을 가져다 주는 것을 보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임을 확인했다”고 너털웃음을 웃었다.
손 대표는 가정형편 때문에 서울법대를 포기하고 한양대행을 택했다. 법조인 배출에 목말라있던 한양대로선 광주·전남지역 예비고사에서 2등하고, 한양대를 수석입학한 그만 쳐다봤다. 대학 설립자이자 당시 총장이었던 김연준 씨도 고시반을 수시로 찾아와 “손군은 언제 합격하나”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장학금도 두둑히 탔다. 당시 9급공무원 한 달 월급이 1만3000원 할 때 그는 장학금으로 1만5000원을 받았다. ‘월급쟁이 학생’은 성원에 보답이라도 하듯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75년 17회 사법시험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1959년 정경대학 법률학과로 출범한 지 16년 만에 한양대에 첫 법조인이 탄생한 것이다. 71학번인 그가 물꼬를 트자 한 해 후배인 정동기 전 대통령 민정수석(72학번)이 사시 18회에 합격하는 등 후배 법조인들이 줄줄이 뒤를 이었다. 지금은 한양대 출신 법조인이 1200여명. 인원만 따져도 법조계 ‘빅5’로 꼽힌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손 대표는 법조계에서 외톨이였다. 대학선배가 아무도 없는 길을 혼자 개척해 나가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 법원인사에 대해선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서울법대 출신들이 독점(14명 중 13명이 서울법대 출신)하고 있는 대법관에 임명되지 않은 것이 손 대표에게 아직도 마음의 상처로 남아 있다.
딸이 서울대에 입학하던 날 손 대표는 서울대 배지를 가슴에 달고 잤는데, 이를 지켜본 아내가 “유치하다”고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손 대표는 “‘마누라조차 내 상처를 모르는구나’라고 생각하니 서글퍼지더라”며 감상에 젖어 인터뷰 도중 천장을 올려다 보기도 했다.
◆소신판결로 도망자 신세도
전두환 등 신군부가 등장한 1979년 12·12 사태 때 손 대표는 광주에서 공군 법무관으로 복무 중이었다. 얼마 뒤 광주 군법회의에 파견 나가 보니 광주 전남 재야인사들이 대거 구속돼 있었다. 법대로 무혐의 결정해 풀어준 뒤로 한동안 도망자 신세가 됐다. “저와 동향이라는 한 사병이 ‘보안대에서 잡으러 가니 빨리 도망가라’고 전화해줬어요. 제법 오랫동안 도망다녔습니다.”
법무관 말년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도중 사망한 140구가 넘는 시체의 검시를 맡았다. 그는 함께 검시에 참여한 의사들에게 “사망 원인을 어려운 한자로 써달라”고 당부했단다. 가늘고 긴 흉기에 의해 찔렸을 경우 ‘자창’(刺創)이라고 사인을 적었는데 이런 내용들이 보안대 검열을 무사통과해 언론에 그대로 보도되면서 파장을 일으켰다고 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군사재판이 있을때 손 대표가 재판부 명단에서 운좋게 빠질 수 있었던 것도 이때 ‘반골’로 찍혔기 때문이다. 서슬 퍼렇던 군사정권의 ‘각하 지시사항’도 그에겐 먹혀들지 않았다. 1985년 DJ(김대중 전 대통령) 귀국 환영벽보사건과 1986년 남부지원(현 서울 남부지방법원) 영장기각사건이 대표적이다. 일당 받고 벽보를 붙인 시골 아주머니들에게 ‘29일 구류에 처하라’는 윗선의 지시를 무시하고 3000원 과료처분했고, 건국대 연합시위사건에선 공부하다 잡혀온 학생들은 영장을 모두 기각해버렸다. 손 대표는 “정의에 대한 용기가 부족한 시대를 살아왔다”며 “꼼수에 저항하는 기질이 있어서인지 권력에 아부하지는 않았다”고 회상했다.
◆서예와 고향땅 병영은 마음의 안식처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일찍부터 맛본 그에게 서예는 마음의 안식처였다. 그는 “마음이 소란스러울 때 붓을 들면 잡념에서 해방되고, 문인화는 자기의 뜻을 표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서당에서 처음 배운 붓글씨에 지금은 “인이 박혔다”고 했다.
서예와 더불어 오늘날까지 손 대표를 이끌고 있는 또다른 정신적 지주는 고향땅 전남 강진군 병영이다. 손 대표의 호 수인(修仁)은 고향마을에 있는 수인산에서 따왔다. 손 대표는 “6·25사변이 아니었으면 이 세상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손 대표 조부는 광해군 때 전라병영 수군 만호장을 지낸 분을 파조로 한 문중의 종손이었다. 조부는 전란으로 대가 끊길 것을 염려해 12대 종손으로 당시 학생이었던 손 대표 부친을 서둘러 장가 보냈고, 그 이듬해인 1952년 손 대표가 태어났다. 그런데 서둘러 맞이한 며느리가 미워졌는지 시어머니가 새 며느리를 맞아들이면서 손 대표는 태어나자마자 얼마 안 돼 생모와 생이별했다.
생모와의 첫 대면은 그의 나이 29세 때였다. 생모가 어떻게 알았는지 그의 결혼식장을 몰래 찾아온 것이다. 부모가 모두 살아계셨지만 조부모가 부모 역할을 자처하면서 그는 부모 없는 자식같이 자랐다. 이를 빌미로 방황하며 자칫 빗나갈 수 있는 사춘기 시절 그를 붙잡아 준 것은 병영교회였다. 그는 이 교회를 ‘예비된 처소’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병영교회의 고 김성래 장로님은 손 대표가 병영상고가 아닌 광주일고로 진학해 운명을 바꾸는 데 결정적 도움을 준, 지금도 가장 존경하는 멘토다.
◆후배들에 희망 전해주고 싶어
법무법인 동인에는 작년 7월 합류했다. 국내 변호사만 65명인 이 중견 로펌을 10대 로펌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이를 위해 현재 강점을 보이는 형사부문 외에 민사부문도 강화하고, 지식재산권 분쟁이나 조세행정분야도 특화시킬 방안을 찾고 있다.
후학양성과 취업지도도 빼놓을 수 없는 그의 관심사다. 한양대는 1986년에 강의 나간 데 이어 작년부터는 석좌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다. 강의과목은 민사소송법이지만 “불안에 떨고 있는 후배들을 치유해주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 “보릿고개를 넘어온 우리가 볼 때 요즘 학생들은 단군이래 최대의 풍요를 누리고 있는데도 인생 자체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들에게 영성적인 희망을 심어주고 싶어요. 독서도 시키고 함께 어울려 밥도 같이 먹으면서 후배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김병일 기자 kbi@hankyung.com
■ 손용근 법무법인 동인 대표
출생 - 1952년 전남 강진
가족 - 부인과 1남2녀
학력 - 광주제일고, 한양대 법학과, 美컬럼비아대 법학부 연수, 한양대 법학석사, 연세대 법학박사
경력 - 17회 사법시험 합격(1975년), 서울행정법원장(2006년), 대고구등법원장(2008년), 사법연수원장(2010년), 현 ()한양대 석좌교수, (현)법무법인(유) 동인 대표변호사, 현 ()한국서화예술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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