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퇴직연금 과열 판촉 위험하다
#장면1:2000년 12월,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상호보험회사인 영국의 '이퀴터블 라이프'는 영업정지를 당했다. 생명보험 산업의 과학화와 현대화를 선도했던 회사였지만 시장 상황 변동을 감안하지 않고 연금 가입자들에게 고정 수익률을 약속한 것이 화근이었다. 100만명이 넘는 가입자들은 올해 4월이 돼서야 보상을 받기 시작했다.

#장면2:올 1월7일 미국 미주리주의 세인트루이스 한 공장 건물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있었다. 자살로 마무리된 이 사건의 범인은 공장에서 23년간 근무하던 사람으로 회사가 퇴직연금 사업비를 부당하게 올려 자신이 받을 연금이 줄어들게 됐다며 회사를 상대로 소송 중이었다.

두 장면은 '은퇴'라고 하는 인생의 전환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은 선택들이 야기할 수 있는 막대한 결과들을 보여준다. 가장 유서 깊은 회사에 은퇴준비를 맡기는 선택,믿고 다니던 회사를 통해 퇴직연금에 가입하는 선택,비록 영국과 미국의 경우이긴 하지만 이제는 남의 나라 이야기만이 아닌 것이 됐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더 이상 노후에 자녀에게 생계를 의지할 수 없고 더구나 국민연금에 크게 기대하기도 어려워졌다. 그 때문에 개인연금에 가입하면 소득공제를 해주고,퇴직연금제도도 도입해 정부 차원에서 노후 대비를 장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 상태로 좋은 것일까.

과거의 퇴직금 제도는 회사가 망하면 퇴직금을 떼이기도 하고 일시금으로 받아 써버리는 경우도 많아 노후 보장 용도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회사 밖의 금융회사를 정해 연금을 적립하고 이직을 하더라도 내 연금 계좌는 가지고 다니면서 꾸준히 적립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퇴직연금제도다.

문제는 퇴직연금시장 규모가 급속도로 성장하며 퇴직연금사업자인 금융회사들 간에 경쟁이 치열해졌고,주된 경쟁 수단인 연금 수익률을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높게 보장한 데에 있다. 9월 국고채 1년물 수익률 3.49%,3년물 3.55%,5년물 3.66%라고 한다. 회사채 3년물도 4.5%가 안된다. 그런데 예컨대 10월1일부터 보름 동안 가입하는 퇴직연금에 대해 1년 동안 보장되는 수익률이 은행권 평균 4.69%,보험 4.95%,증권은 5.09%이다. 3년 단위나 5년 단위 계약은 수익률이 당연히 더 높다. 무슨 재주가 있기에 돈을 굴려서 벌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가입자들에게 주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런 고금리 경쟁이 무책임하게 자산 규모만 늘리려는 금융회사들만의 탓일까? 금융산업은 규제산업이다. 시장이 경쟁적으로 작동할 수 없는 '시장의 실패'가 발생할 여건들을 고루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어떤 산업 영역보다도 정부 개입이 깊숙한 산업이다. 특히 퇴직연금처럼 장기로 운용돼야 하는 상품은 돈을 맡은 금융회사가 얼마나 안전하면서도 적절하게 수익을 내도록 운용하는지 연금가입자가 세세히 알기 어려운 '정보 비대칭'이 심각하다.

퇴직연금에 대한 공식 정보를 제공하는 고용노동부 퇴직연금 사이트에는 '안정적인 금융기관'을 선택하라고 하면서도 연금사업자는 수익률만 비교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대형 검색 포털에서 '퇴직연금' '개인연금' 등을 검색하면 금융회사들로 도배가 되고 정부기관 링크는 거의 없다. 영국의 금융감독기관인 FSA(Financial Services Authority)가 'Money Advice Service'란 사이트를 통해 국민의 다양한 인생 국면에 맞는 공신력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결국 금융소비자들이 알아서 똑똑하게,고금리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정부 당국이 당장 터질 문제는 아니어서 살짝 소홀한 동안에는 말이다. 십수 년 후에 '우리나라는 총이 없어서 참 다행이다'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일이 생기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