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정가에서 "약사회 파워가 세긴 세다"는 말이 퍼지고 있다. 감기약 등 일반의약품(OTC)의 슈퍼 판매를 반대하는 대한약사회의 집단행동이 국회에서 먹혀들고 있는 상황을 빗댄 말이다. 여의도 주변에선 "정당들이 내년 총선을 의식해 약사회 눈치를 보고 있다""약사회의 집단이기주의가 '도(度)'를 넘어섰다"는 말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정부가 지난 27일 국무회의를 열고 감기약 · 소화제 · 해열제 등 가정상비약에 대해 약국 외 판매를 허용하는 약사법 개정안을 의결했지만,여야 의원들 대부분이 개정안에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다. 개정 약사법 처리의 키를 쥔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국회의원은 모두 24명.이 가운데 9명은 확고한 반대 입장이고 14명은 입장 유보다. 찬성은 손숙미 한나라당 의원뿐이다.

약사회 활동 회원은 3만명 정도다. '장롱면허자'나 월급약사 등 등록 회원을 모두 끌어모아도 6만명 수준이다. 하지만 약사회가 정치권에 미치는 입김은 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일례로 총선 때마다 정당들은 비례대표 의원직을 내주면서 약사회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려 부단히 애쓴다. 한나라당은 17대 때 문희 전 한국여성약사회장을,18대 국회에선 원희목 전 대한약사회장을 비례대표로 각각 등원시켰다. 민주당 비례대표인 전혜숙 의원도 경북약사회장 출신이다.

약사회가 정치권에 유달리 강한 이유는 회원들 대부분이 약국을 직접 운영하는 '개업약사'이기 때문이다. 개업약국들은 지역별로 거점화돼 있고 주민들과의 접촉빈도가 높아 지역사회에서 '여론 메이커'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게 정치권의 판단이다. 특히 약사들은 1990년대 중반 '한 · 약 분쟁'과 2000년 '의 · 약 분쟁'을 거치면서 어느 직능단체보다 끈끈한 결속력을 다져왔다. 지역구 의원들로서는 아군은 못될 망정 절대로 적(敵)으로 돌려서는 안되는 세력인 셈이다.

정치권에선 "여성 약사들의 남편 중 유력인사가 많아 전투력이 두 배"라는 말도 있다. 실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부인 손명순 여사나 손학규 민주당 대표의 부인 이윤영 여사 등이 약사 출신이다. 한나라당 수도권의 한 의원은 "얼마 전 지역 약사들이 조직적으로 전화와 문자메시지로 'OTC 슈퍼 판매에 찬성하면 낙선운동을 벌이겠다'는 뜻을 전해오고 있다"며 "지역구에 개업약사가 100명 정도 되는데 이들에게 찍히면 선거는 물 건너간다"고 털어놨다.

약사회는 지난 8월부터 박카스 · 마데카솔 같은 품목들이 슈퍼에서 판매되자 정부를 상대로 '의사 처방이 있어야 살 수 있는 전문의약품을 줄여라','처방전 없이도 살 수 있는 일반약을 늘려라'고 집요하게 요구하고 있다.

여권의 한 고위인사는 "조직력과 자금력에서 약사회는 이미 거대공룡이 됐다"며 "국민의 70%가 찬성하는 의약품 슈퍼 판매가 조직화된 특정 이익집단의 벽에 가로막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부끄럽다"고 자책했다.

이준혁 기자 rainbo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