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중반 앨런 그린스펀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 시절.물가를 잡기 위해 정책금리를 올렸지만 시장금리는 오히려 떨어지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그린스펀도 이유를 알 수 없어 곤혹스럽다고 밝힌 이 현상은 월스트리트에서 '그린스펀 수수께끼(Greenspan's conundrum)'로 불렸다. 당시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이 막대한 외환보유액을 바탕으로 미국 국채를 사들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수수께끼가 풀렸다.

◆기준금리 인상해도 장기금리는 하락

기준금리 올려도 시장금리 하락…'그린스펀 수수께끼' 옮겨 왔다
지금 국내에서 벌어지는 현상도 비슷하다. 한국은행은 올 들어 기준금리를 연 2.50%에서 연 3.25%까지 0.75%포인트 올렸지만 채권시장에선 외국인의 공격적 매수세가 유입되면서 시장금리는 전반적으로 하락세를 보였다. 외국인은 올해 들어서만 국내 채권 보유액을 9조원가량 늘렸다.

최근 들어 10년 이상 장기물을 주로 사들인 외국인 중 상당수는 중국 등 아시아 신흥국의 중앙은행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은행은 단기 수익을 노린 투자보다 장기적인 포트폴리오 투자 목적으로 채권을 사들인다는 점에서 국내 채권시장의 강세 기조가 이어질 가능성이 한층 커졌다고 볼 수 있다.

16일 채권시장에서 3년 만기 국고채 금리가 전날보다 0.03% 오르는 등 반등하기는 했지만 추세적인 상승세로 보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박종연 우리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장기채권 금리와 기준금리 격차가 좁혀져 차익실현 부담이 커졌지만 대내외 환경을 감안할 때 섣불리 채권을 내다 팔기 힘들다"고 말했다.

◆세계경제 침체 가능성 커져

기준금리 올려도 시장금리 하락…'그린스펀 수수께끼' 옮겨 왔다
외국인이 국내 채권을 적극적으로 사들이는 것은 세계 경제가 침체될 가능성이 커진 데다 미국 독일 일본 등 주요 선진국의 국채 금리가 낮아져 돈 굴릴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일본이 장기불황 여파로 제로(0) 금리를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 Fed가 최근 경기부양을 위해 '향후 2년간 제로(0)금리 유지'를 선언했다. 이에 따라 유럽 재정위기에 따른 반사이익으로 미국 채권시장에서 벤치마크 역할을 하는 10년 만기 채권 금리는 연 1.9%대로 떨어지기도 했다. 독일 국채 금리도 2%를 밑돌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 국고채 금리는 연 3%대로 여전히 높은 편이다.

◆환율 변동이 관건

유럽계 자금의 이탈 가능성과 최근 급등세를 보이고 있는 원 · 달러 환율은 국내 채권시장을 요동치게 만들 수 있는 변수다. 환율이 오르면 외국인 입장에선 환손실 때문에 채권 수익을 까먹을 수 있다.

문홍철 동부증권 애널리스트는 "유럽 국가의 원화 채권 보유잔액은 12조1000억원으로 외국인 전체 보유액(약 86조원)의 14%가량"이라며 "원 · 달러 환율이 기조적인 상승세로 돌아서면 유럽계를 중심으로 외국인이 채권을 팔고 나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