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생상품의 '바다이야기'…無인가 선물투자업체 '활개'
#사례1. 개인투자자 A씨는 지난달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선물대여계좌업체 B사로부터 B사 명의로 된 계좌를 제공받아 선물투자를 했다. 당시 A씨가 필요한 선물투자 증거금은 1억5000만원.그러나 A씨가 가진 돈은 2000만원에 불과했다. B사는 1억3000만원을 넣은 계좌를 빌려줬다. A씨의 돈을 합쳐 B사 명의 계좌에 증거금 1억5000만원이 만들어졌고,A씨는 곧바로 투자에 나섰다. 그러나 송금 후 단 58초 만에 지수 하락으로 손실이 나면서 A씨는 원금 2000만원을 모두 날렸다. B업체는 손실이 나자 재빨리 반대매매를 해 자신들의 돈은 지켰다. 게다가 A씨에게서 수수료까지 챙겼다.

#사례2.서울에 사는 C씨는 최근 '고액의 증거금 없이 선물거래 가능''고수익 보장'이란 문구가 적혀 있는 D업체의 인터넷 홈페이지 배너 광고를 보고 이 회사가 빌려준 명의의 계좌를 이용해 투자에 나섰다. 계좌당 증거금 50만원이 필요하며 5개 계좌까지 빌릴 수 있다는 말에 C씨는 회원가입 후 300만원을 보냈다.

C씨는 며칠 후 홈트레이딩시스템(HTS)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증권사 HTS와 달리 1계약 거래금액이 선물거래의 10분의 1인 5만원이란 걸 알게 됐다. 회사 측 설명이 가관이었다. "실전투자가 아니라 회원끼리 모의투자를 통해 실력을 겨루는 게임으로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남은 투자금 200만원의 인출을 요구했지만 D사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C씨의 투자금을 돌려주지 않았다.

선물 거래시 필요한 증거금이 부족한 개미투자자에게 계좌를 빌려주고 수수료를 챙기는 무인가 선물대여계좌업체가 성행하고 있다. 이들 업체는 겉으로는 선물계좌를 빌려주는 금융투자업체로 위장했지만 실상은 대출(증거금)해주고 이자(수수료)를 받는 고리사채업체와 비슷한 수익구조를 갖추고 있다. 최근엔 변형된 '미니선물'업체들이 등장,증권가를 긴장시키고 있다. 증권가의 '바다이야기'로 불리는 '미니선물'은 증권사 HTS와 비슷한 프로그램을 자체 제작,불법 사설경마처럼 가입자들끼리 거래를 성사시켜 수수료와 가입비를 뜯어가는 구조다. 이들 업체가 손실을 입을 경우 사이트를 폐쇄하고 잠적하면서 피해가 늘고 있다.

◆선물대여계좌…변형된 사채놀이

파생상품의 '바다이야기'…無인가 선물투자업체 '활개'
지난달 25일 경북지방경찰청은 불법 선물거래 사이트를 운영하며 선물거래를 한 혐의로 'N선물' 대표 유모씨(41)를 구속했다. 또 불법 선물거래업체 39곳을 적발해 73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경북경찰청에 따르면 이들 선물대여계좌업체는 주로 대부업자로 등록했다. 자기 회사나 직원 명의의 계좌로 증거금 일부를 입금하면 나머지 증거금을 빌려주는 무인가 투자중개업으로 위장,목돈이 없는 투자자들을 끌어들여 수수료를 챙겨왔다.

이들이 제시하는 수수료는 0.018~0.025%로 큰 부담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한 번 사고 팔 때마다 내는 수수료라는 걸 감안하면 적은 금액이 아니다. 계좌대여업체들은 증거금을 빌려준다는 명목으로 사실상 개인투자자들에게 '대출'을 해주는 셈이다. 통상 선물 1계약을 기준으로 2000만원 정도의 증거금을 빌려주지만,투자자들은 베팅 규모에 따라 1억원 이상의 증거금을 대출받기도 한다. 1억원 이상의 증거금이 든 계좌를 빌린 투자자가 사고 팔 때마다 0.025%의 수수료를 낸다고 가정하면 100번 거래시 250만원(2.5%)이 수수료로 나간다. 1년 동안 거래횟수가 1000번이면 2500만원이 중개수수료로 뜯겨 나간다. 고리사채 수준이다. 구속된 유씨가 선물거래 프로그램과 증거금 계좌를 대여,10개월 동안 300억원의 매매대금을 받아 챙긴 수수료만 21억원인 걸 봐도 알 수 있다.

◆'미니선물'은 불법 인터넷 도박

계좌대여업체들이 변형된 '대부업'이라면 미니선물은 사실상 불법 인터넷 도박이다.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투자자를 모집,HTS를 제공하고 수수료를 받는다는 점에선 대여계좌업과 비슷하다.

대여계좌와 다른 점은 증권사 HTS가 아니라 자체 제작한 프로그램을 이용해 선물거래를 유도한다는 것.코스피200지수를 기준으로 하되 계약당 거래금액을 50만원이 아닌 5만원이나 10만원으로 줄여 게임처럼 투자할 수 있도록 한 게 특징이다. 선물거래와 비슷한 모의투자 사이트를 열어놓고 회원으로 가입한 사람들끼리 '선물 도박'을 벌이는 셈이다. 수수료는 기존 대여업체들보다 훨씬 적은 0.0015%.기존 대여업체들은 투자금액에 제한이 없지만 미니선물업체들은 대부분 1계약 거래만 허용한다. 업체들은 투자자의 손실금액을 고스란히 챙긴다. 여기에 수수료까지 받는다.

장동훈 유진투자선물팀장은 "선물대여계좌는 무(無)인가라는 점에선 불법이지만 계좌를 빌려서 투자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정상적인 투자인 반면 변형된 미니선물은 불법 사설도박으로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금융당국,단속엔 한계

인가 · 등록 없는 무인가 선물투자업체로 인해 투자자들의 피해가 계속 발생하고 있지만 정작 금융당국은 정확한 업체 현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인터넷에 사이트를 개설하는 업체들을 일일이 파악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워낙 교묘하게 운영되고 있어 계좌만 빌려주는 업체와 미니선물업체의 구분도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이 관계자는 "투자자들은 투자시 적법한 업체인지를 반드시 확인하고 과도한 수익을 제시하는 업체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당부했다.

현행법상 불법 선물대여계좌 영업으로 적발되면 5년 이하 징역 또는 2억원 이하 벌금형을 받게 된다. 그동안 금감원 등에 적발된 무인가 업체들은 대부분 벌금형이나 기소유예 처분을 받는 수준에 그쳤다.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다 보니 이들 업체는 단속에 걸려도 업체명을 바꿔가며 계속 영업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박종문 경북지방경찰청 수사과장은 "개인 투자자 입장에서는 고액의 증거금이 필요한 제도권 증권회사와 달리 적은 돈으로 선물투자가 가능한 무인가 업체가 매력적일 수 있다"며 "불법 업체들이 투자금만 챙겨 달아나거나 불안정한 전산망 탓에 손실을 보는 사례도 많은 만큼 피해는 더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김동민/대구=김덕용 기자 gmkd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