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미(39)는 1999~2000년 2년 연속 상금왕,2001~2002년 상금랭킹 2위를 차지한 최고 스타였다. '스마일'이라는 별명과 함께 국내 여자프로골프계의 '흥행 보증수표'였다.

그는 국내 정상의 자리를 버리고 32세 때 미국으로 떠나 30대를 '도전의 삶'으로 보냈다. 기쁜 일보다 힘든 일들이 많았다. 지금도 투어에서 허덕이는 '악몽'을 꾼다. 잠에서 깨어나 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한다.

그러나 그는 "다시 32세로 돌아가도 미국행을 선택할 것"이라고 말한다. 국내에서 뛰었으면 몸과 마음은 편했을지 모르지만 끝까지 후회가 남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실패와 성공 여부를 떠나 미련을 없애버린 것이 가장 큰 수확인 셈이다.

국내로 복귀한 뒤에는 외로움에 시달렸다. "미국 생활은 이방인의 삶이잖아요. 낯설고 혼자 떨어져 있는 느낌이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국내에 와서도 그런 비슷한 느낌이 한동안 계속 됐어요. 여전히 제가 이방인 같았죠."

그는 현역 선수 중 가장 나이가 많다. 두 번째로 나이 많은 선수와도 일곱 살 차이가 난다. 그래서인지 후배들을 대하는 것이 더 조심스럽고 어렵다. 말과 행동 하나도 여간 신경쓰이는 게 아니다. 예전에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텃세'를 부리던 것과는 딴판이다. 오히려 "예쁜 옷 입었구나"하면서 먼저 다가간다.

국내 프로들의 실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대단하지요. 7~8년 전만 해도 우승 경쟁을 하는 선수는 5~10명 안팎이었어요. 지금은 그 숫자가 50명 정도로 늘어난 것 같아요. 메트라이프 · 한국경제 KLPGA챔피언십도 누가 우승할지 몰라요. 메이저대회여서 모두 목숨 걸고 칠 테니까요. "

최근 오른쪽 팔에 엘보가 왔다. 아플 때는 가만히 있어도 팔이 떨리기까지 한다. 한국에 오자마자 부상에 시달리니 처음에는 화도 나고 속이 상했다. 그때 아버지가 전화로 "잘 안 맞지.어떻게 하면 잘 칠 것 같냐"고 물었다. 묵묵부답이던 그에게 아버지는 "네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여라.골프는 인생이라는 큰 숲의 한 나무에 불과하다"며 위로해줬다.

그는 기회가 된다면 골프 의류나 골프 연습 등과 관련한 비즈니스를 해보고 싶어한다. 결혼에 대해서는 "골프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골프를 오래 해서 그런지 무슨 일을 결정할 땐 단호해요. 누가 뭐라고 해도 제 직감에 충실하지요. 모두가 괜찮다고 해도 제가 아니면 '노'거든요. 확 빠질 만한 사람이 나타나면 '올인'할 텐데 잘 안 되더라고요. "

그는 미국 LPGA투어 못지않게 국내 투어가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했다.

"협회나 스폰서들이 좋은 대회,선수들을 위해 많이 노력하고 있어요. 후배들의 프로 정신도 좋고요. 과거에는 사인을 요청하면 창피해하거나 일부러 피하곤 했지요. 팬들과의 소통이 없었던 거죠.그러나 요즘 선수들은 사인을 해주면서 팬을 감동시켜요. 정말 놀랐어요. "

그는 어느덧 투어에서 후배들의 '그늘'이 돼주고 있다. 선수들에게 이모처럼 살갑게 자신의 경험담을 전해준다. 후배들의 어머니도 문제가 생기면 그를 찾아온다.


한은구 기자 to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