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헤미안'은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거부하고 아웃사이더로 혹은 궁핍 속에서 살아가는 예술가나 작가,저널리스트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들의 반전통적인 입장은 성적 자유분방함이나 자발적인 빈곤 등의 방법을 통해 표출되곤 해서 주류사회가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이 용어가 처음 등장한 곳은 프랑스였는데 원래는 루마니아 사람으로서 보헤미아를 거쳐 서부 유럽에 들어온 집시를 일컫는 말이었다. 이 점은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의 리브레토에도 집시라는 말 대신 보헤미안이라는 용어가 쓰인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루마니아 출신의 방랑자들이 도무지 사회 규범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살았기 때문에 보헤미안이라는 딱지는 결코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점차 이 집시들의 거주지에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반항적이고 자유분방한 삶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이 모여들면서 이들에게도 경멸적인 뉘앙스의 '보헤미안'이라는 호칭이 붙여졌다. 오늘날의 보헤미안이라는 칭호는 전적으로 후자를 뜻하는 것이다.

보헤미아 사람들로서는 참으로 억울한 노릇이었다. 집시들이 그곳을 거쳐 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두 눈 멀쩡히 뜨고 자신들의 호칭을 도둑맞았기 때문이다. 사실 보헤미아는 스위스,오스트리아와 함께 중앙 유럽의 고원지대로 오래도록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빽빽한 숲으로 둘러싸인 미지의 땅이었다. 이 고원을 무대로 순박한 보헤미아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자연을 경외하며 소박한 삶을 살아왔는데 난데없이 자신들을 호칭하는 말이 반항적 뉘앙스를 풍기는 말로 변질됐으니 얼마나 기가 차겠는가.

보헤미아 자연의 아름다움을 처음 발견한 것은 독일 낭만주의자들이었다. 문명의 세례를 받지 않은 야생의 자연에서 창작의 영감을 얻으려 했던 문필가와 화가들은 인간의 손때가 묻지 않은 보헤미아의 자연에 매료됐다.
그중에서도 폴란드의 실레지아 지방과 살을 맞댄 북부지역의 '리젠게비르게(거인산맥 · 체코어로 크르코노셰)'는 독일 예술가라면 반드시 방문해야 할 일종의 미의 순례지로 꼽혔다.

1000m가 넘는 봉우리만 수십 개에 이르는 이 험준한 산맥은 18,19세기에 들어와 오랜 베일을 벗고 중 · 북부 유럽의 인기 있는 등반지로 떠오르고 있던 참이었다. 실러와 함께 질풍노도 운동을 이끌었던 젊은 시절의 괴테와 낭만주의 풍경화가 카스파르 다피트 프리드리히,카를 구스타프 카루스도 이 험준한 산맥에 올라 대자연으로부터 영감을 구했다.

19세기를 통틀어 독일 최고의 인기 풍경화가로 군림한 아드리안 루트비히 리히터(1803~1884)도 선배들의 전례를 따라 1838년 이곳을 방문했다.

젊은 시절 메시앙 도자기 공장에서 도자기 위에 그림을 그렸고 동화책의 삽화용 판화를 제작하기도 했던 그의 그림들은 대중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어딘가 모르게 이발소 그림의 분위기가 풍기지만 리젠게비르게를 그린 일련의 풍경화만큼은 선배 프리드리히 뺨칠 정도로 만만치 않은 수준을 뽐낸다.

'리젠게비르게의 호수'는 그중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히는 작품이다. 이 그림은 화가가 8월14일 스핀들러 산장에서 밤을 지새운 후 실레지아 방면으로 향하던 길에 마주친 드라마틱한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그날 따라 일기는 고약하기 이를 데 없어 여름답지 않게 으스스한 한기가 뼛속 깊이 침투했고 폭풍우까지 휘몰아쳐 저녁 무렵 화가는 거의 탈진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림을 보면 좌우에 고봉이 자리하고 있고 그 사이에 화산 분출로 이뤄진 듯한 호수가 짙푸른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주변의 산등성이에 나무가 전혀 보이지 않고 오로지 녹색의 엷은 채색만 가해져 있어 감상자로 하여금 이곳이 고산지대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하늘은 검은 먹구름을 드리운 채 오만상을 짓고 있어 금방이라도 장대비를 쏟아부을 것 같다.

전경에는 부자지간으로 보이는 두 여행객이 사냥개를 데리고 호숫가의 바윗길을 잰걸음으로 내닫고 있다. 두툼한 외투에 모자까지 쓴 채 잔뜩 움츠린 여행자의 행색과 굳은 얼굴 표정은 지금 이들이 얼마나 혹독한 악천후에 노출돼 있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의 옷자락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점이라든가 머리를 아래로 숙이고 다소 낮은 포복 자세로 주인 일행을 따라가는 견공의 모습 역시 이 여행이 결코 녹록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리히터는 이 폭풍 전야의 극적인 풍경을 통해 우리 앞에 가로놓여진,피할 수 없는 인생의 험로를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세의 삶을 여행 혹은 항해에 비유한 선배 프리드리히를 본받았던 그는 평소 험난한 자연의 도전을 헤치고 나아가는 인간군상을 즐겨 화폭에 옮겼다.

그러나 우리의 앞길에 폭풍우만 몰아친다면 너무 절망적이지 않은가. 다행히 리히터는 둘도 없는 희망의 전도사였다. 먹구름 뒤 들판 저편을 보라.밝은 하늘이 살며시 고개를 들고 있지 않은가. 리히터는 누구든 시련을 견디고 나면 '쨍하고 해뜰날'이 올 거라며 우리의 등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보헤미아의 웅혼한 대자연은 화가의 그런 희망 메시지를 설파하는 데 최상의 무대인 셈이다.

정석범 < 미술사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