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 사장 12명이 무더기로 고소되는 초유의 사태 중심에는 강력한 하드웨어와 전문지식으로 무장한 스캘퍼들이 있다. 대규모 거래를 일으키는 이들 스캘퍼를 유치하기 위해 최고경영자까지 나서 적극적으로 영업하다가 파국을 맞은 셈이다. 스캘퍼에 대한 과도한 편의제공은 3만여명의 일반투자자에게 손실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데도 회사차원에서 진행한 것은 그만큼 증권사들의 윤리의식이 희박하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평가다.

◆"주문속도만 빠르면 무조건 먹는다"

초단타매매로 불리는 스캘핑은 인디언 부족들의 전쟁풍습에서 유래된 용어다. 승리 후 적의 얼굴 가죽을 벗겨 전리품으로 챙기는 행동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피를 말리는 냉정한 승부라는 뜻이 내포된 셈이다. 스캘퍼들 간의 경쟁도 뜨겁다. 스캘퍼 간 경쟁에서 1등을 하지 못하면 가장 유리한 호가를 놓치고 이는 손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국내에는 30개 안팎의 스캘퍼 조직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증권사에 자리를 잡거나 부티크 형태의 외부사무실에서 대규모 거래로 시장을 교란한다. 이번에 잡힌 곳은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5개 팀이다. 특히 구속기소된 스캘퍼 S씨(40)가 속한 여백팀이 원조격으로 꼽힌다. A증권에서 정보기술(IT)을 담당하며 주식워런트증권(ELW) 시스템을 구축하다 터득한 노하우로 스캘핑을 시작했다. 서울 여의도백화점에 사무실이 있다해서 여백팀으로 불린다. 여백팀의 성공에 자극받아 2009년 이후 유사한 팀이 우후죽순처럼 탄생했다.

스캘퍼들의 최대무기는 우수한 하드웨어다. 빠른 속도로 정확히 계산해내는 장비를 갖추고 남들보다 유리한 가격에 매매를 체결하는 방식으로 수익을 쌓아가기 때문이다. 한 스캘퍼는 "증권사 주문시스템에 빨리 도달하기만 하면 무조건 먹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100억원으로 시작하면 하루에 1억원씩 먹을 수 있다며 동업을 제의받았지만 불법적인 매매라 거절했다"고 말했다.

다른 전문가는 "빠른 차를 타고 하이패스로 통과하는 차가 당연히 일반게이트를 통과하는 차보다 빠르지 않겠느냐"며 "불공정한 게임판을 벌인 증권사들의 반성이 앞서야 한다"고 설명했다.

◆증권사들의 공모와 방조가 파장 키워

스캘퍼들이 아무리 우수한 하드웨어와 전문지식으로 무장했다 해도 증권사들의 도움이 없이는 활동이 쉽지 않다.

증권사들은 일반적으로 자산가를 우대하듯 많은 자금으로 대규모 거래를 일으키는 스캘퍼에 편의를 제공하는 것을 문제삼을 수 있느냐고 주장한다. 하지만 업계 전문가는 "증권사의 지원 없이는 스캘핑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불법의 소지가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불공정한 행위인 줄 알면서도 증권사가 스캘퍼와 공모에 나선 이유는 당연히 돈이 되기 때문이다. ELW 거래 1억원당 수수료가 1만5000원에 달한다. 한 스캘퍼가 5억원으로 하루에 100번만 돌려도 거래대금이 500억원이고,수수료는 750만원이 떨어진다. 스캘퍼들의 활동이 정점에 달했던 지난해의 경우 이들의 하루 거래대금은 8000억원 선에 달했다. 하루 수수료수입만 1억2000만원이다.

이에 따라 증권사 간 스캘퍼 유치전이 뜨거웠다. 웬만한 증권사들은 거의 대부분 스캘퍼 영업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중견 H증권사는 스캘퍼를 직원으로 채용하기도 했다.

숨죽이던 스캘퍼들이 최근 다시 활동에 나서는 조짐도 보인다. 한 전문가는 "당분간 소강상태가 이어지겠지만 ELW 비밀을 담은 판도라 상자가 열렸기 때문에 오히려 슈퍼메뚜기의 대중화로 이어질 수도 있다"며 감독당국과 업계가 적극적으로 시장 정화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광엽 기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