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오전 서울 김포공항 3층 국제선 출국장.파스텔톤 상의 재킷과 연하늘색 셔츠를 입은 이건희 삼성 회장이 천천히 출국심사대로 향했다.

김순택 미래전략실 부회장과 장남인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이 뒤를 따랐고 삼성전자 신종균 무선사업부 사장과 윤부근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 사장도 배웅나왔다. 이 회장은 기자들과 잠시 눈인사만 나눈 뒤 별말 없이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홍라희 리움미술관장도 없이 혼자였다.

삼성 안팎에선 이 회장이 숙고(熟考)에 들어갔다는 관측이 나온다. 지난주 "삼성 전체에 부정이 퍼져 있다"며 강도 높은 쇄신을 주문한 그는 왜 갑자기 일본행을 택한 것일까.

이 회장은 1987년 12월 삼성 회장에 취임한 이후 경영상 중요한 순간마다 일본으로 향했다. 지인들에게 조언을 구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구상을 가다듬기 위해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홀로 도쿄 유학길에 올라 와세다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이 회장은 일본 학계와 재계 등에 많은 지인을 두고 있다. 삼성 관계자는 "뭔가 생각을 가다듬으려는 것 같다"며 "귀국 후 어떤 쇄신책을 내놓을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1993년 6월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고 했던 신경영 선언(프랑크푸르트 선언) 직전에도 일본에 들렀다. 당시 이 회장은 삼성전자 사장단과 함께 도쿄 도청,전자상가 밀집지역인 아키하바라 등을 둘러보고 12시간에 걸친 마라톤 토론을 벌였다.

"변화와 개혁을 강조했지만 몇년이 지나도 달라지는 게 없다"며 답답함을 호소하던 이 회장이 그때 일본에서 만난 인물이 후쿠다 시게오 전 삼성전자 고문이다. 후쿠다 고문은 이 회장에게 삼성전자가 디자이너들을 '심부름꾼' 정도로만 보고 있다고 꼬집었고 이는 삼성전자 디자인경영의 시초가 됐다. 이 회장은 이후 "국가도 기업도 개인도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며 곧바로 삼성 경영진 200여명을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불러 '신경영'을 선포했다.

이 회장은 올초에도 "앞으로 10년 뒤 삼성을 대표하는 제품들이 모두 사라질 것"이라고 심각한 위기감을 표한 뒤 일본으로 향했다. 귀국길에서 그는 "세상이 하도 빨리 바뀌니까 10년 후,20년 후가 어떻게 될지 상상 못할 지경"이라며 "일본에서 옛날 학교 동창,교수,사업가들을 만났는데 그 사람들도 앞으로 어떻게 될 지 아무도 확신을 하지 못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김현예 기자 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