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솔로몬 왕은 스스로를 "사람들 가운데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칭했다. 사도 바울은 "나는 바보로서 말합니다. 나는 더 바보입니다"라고 했다.

자신이 얼마나 똑똑한지 소위 ‘스펙’으로 증명하기에 바쁜 현대사회에 어리석음이야말로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길이라고 제시한 16세기 유럽의 대표적인 인문주의 사상가, 에라스무스의 번역서가 출간돼 주목을 받고 있다.

'우신예찬'으로 널리 알려진 에라스무스의 <Stultitiae Laus>가 출간된 지 꼭 500년만에 <바보 여신의 바보 예찬>이란 이름으로 새로 태어났다. 국내에선 최초로 라틴어 원전을 한글로 직접 번역한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당시 교회의 위선과 폐습을 풍자하고 관용의 정신을 강조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1517년에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 운동을 일으켰을 때도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존중과 종교적 관용을 주장하며 중립을 지켰다.

그의 저서는 1559년 이후 가톨릭교회의 금서목록에 지정돼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는 듯 했다. 그러나 17세기부터 시작된 계몽주의로 에라스무스의 사상은 다시금 주목 받아 휴머니즘, 세계시민주의, 범유럽주의의 상징이 돼 왔다.

<바보 여신의 바보 예찬>에서 에라스무스는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행복한 인생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이 책의 화자인 바보 여신은 특유의 재치있는 말투로 사람들에게 어리석게, 그러나 행복하게 살 길 권한다. 이 것이 시대를 막론하고 에라스무스의 혜안이 독자들에게 뜻 깊게 다가서는 이유다.

"속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속지 않는 것이 가장 불행한 일입니다. 인간의 행복이 객관적 사실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겁니다. 행복은 의견에 달려 있어요. 왜냐하면 인간사는 너무나 다양하고 애매해서 아무것도 확실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에요."(본문 143쪽)

에라스무스가 책의 곳곳에서 인용한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고전과 역사를 알고 읽으면 더욱 재밌다. 그러나 배경지식이 없더라도 이 책에는 모두 300여개의 주석이 풍부하게 달려 있어 누구나 막힘없이 ‘바보 인생’을 즐길 수 있다. 무한 경쟁 사회 속에서 똑똑하게 살아가는 데 지쳤다면 바보 여신에게 어리석은 삶을 한 수 배워보는 것은 어떨까.

◇바보 여신의 바보 예찬/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지음. 차기태 옮김/ 296쪽/ 1만3000원/ 필맥

한경닷컴 정인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