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셋·휠라코리아, 타이틀리스트 인수] 미래에셋 10년 만에 업계 선두로 이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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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현주 회장은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은 금융업계의 신화로 통한다. 창업 10년도 안 돼 미래에셋을 업계 선두자리에 올리며 한국 금융사의 큰 흐름을 써왔기 때문이다. 성장세도 무서웠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을 내놓으며 시장을 선도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의 성공 스토리는 미국 하버드대 비즈니스 스쿨의 사례연구 주제로 선정되기도 했다.
박 회장은 1958년 광주에서 태어나 광주일고와 고려대를 졸업했다. 그가 처음 증권시장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고려대 경영학과 2학년 때.돈 관리하는 법을 배우라는 뜻으로 어머니가 1년 학비와 생활비를 몽땅 부쳐줘 주식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그 이후 강의를 들어도 주식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에 가장 관심이 가고 해서 명동 증권가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학원생이던 1984년 마침내 조그만 사설 투자자문회사를 설립했다. 증권 투자로 번 돈으로 서울 회현동 코리아헤럴드 빌딩 18층에 20평 남짓한 사무실을 얻었다. 직원도 한 명 두었다. 그때가 26세였으니 타고난 투자가인 셈이다.
본격적으로 금융투자업에 뛰어든 것은 동양증권에 입사한 1986년.그의 명성을 익히 듣고 특채하겠다는 증권사도 있었지만 마다하고 동원증권 영업부 사원으로 입사했다. 증권가 최고 스타였던 이승배 당시 동원증권 상무의 영업 스타일과 브로커로서의 자세를 배우고 싶었던 그는 여러 차례 문전박대를 이겨내고 입사에 성공했다.
그로부터 불과 45일 뒤 대리로 승진하는 특유의 실력을 발휘했다. 코스피지수가 처음으로 1000선을 돌파한 뒤 곧바로 폭락세로 돌아서 모든 사람들이 지점 근무를 기피하던 1989년 박 회장은 지점장을 자원했다. 당시 지점 훈이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앞으로 달려나가는 것이다'였다. 젊은 박현주는 꿈을 현실로 만들고자 '바람개비'를 돌리듯 저돌적으로 돌진했다. 그는 노무라증권의 '퀵 영(Quick Young) 전략'을 벤치마킹해 패기만만한 젊은이들로 영업 진용을 새로 짰다. 그의 전략이 맞아떨어져 동원증권 중앙지점은 1993년 1조4000억원의 주식 약정(매매 체결액)을 올리며 전국 1위 지점으로 부상했다. 이른바 '박현주 신화'의 시작이었다. 이듬해 압구정지점장이 돼서는 2년 연속 전국 증권사 지점 중 약정액 1위라는 전무후무한 기록도 세웠고,1995년엔 최연소로 강남본부장 겸 이사로 발탁됐다.
하지만 1997년 6월 박 회장은 당시 구재상 압구정지점장,최현만 서초지점장 등 8명의 '박현주 사단'과 함께 잘 나가던 자리를 박차고 나와 미래에셋캐피탈을 세웠다. 1998년 12월에는 미래에셋자산운용을 설립하고 자신의 이름을 내건 국내 최초의 뮤추얼펀드 '박현주 1호'를 출범시켰다. 500억원 규모로 출범한 '박현주 1호'는 2시간30분 만에 판매를 마감하는 기록을 세웠으며,수익률도 100%를 넘겼다. 뮤추얼펀드가 성공하자 다른 자산운용사들도 유사 상품을 앞다퉈 내놓는 등 뮤추얼펀드 붐을 일으켰다.
적립식 펀드의 대중화를 이끌며 은행 예금 위주의 저축문화를 2004년 이후에는 적립식 펀드 위주의 투자문화로 바꾸는 데도 기여했다. 2005년에는 생명보험사를 인수해 미래에셋을 증권,자산운용,보험으로 짜인 투자전문그룹으로 도약시켰다.
시련도 있었다. 손대는 일마다 승승장구하던 박 회장은 2007년 말 최고 시험대에 섰다. 그해 10월 말 시중 자금을 싹쓸이하며 펀드 시장에 돌풍을 일으켰던 '인사이트펀드'가 대규모 손실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한 달 만에 4조원어치가 팔렸지만,정확히 6개월 후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수익률이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그는 뚝심으로 투자자들을 설득했고 인사이트펀드는 원금을 회복해갔다.
박 회장은 2010년을 '글로벌 경영 원년'으로 삼고 "10년 안에 미래에셋을 글로벌 컴퍼니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이번 아큐시네트 인수도 그의 글로벌화에 대한 노력의 결실이란 평가다. 박 회장은 이제 '아시아를 선도하는 글로벌 금융사'라는 목표를 향해 누구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신화를 해외 시장에서 써내려가고 있다.
유병연 기자 yooby@hankyung.com
박 회장은 1958년 광주에서 태어나 광주일고와 고려대를 졸업했다. 그가 처음 증권시장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고려대 경영학과 2학년 때.돈 관리하는 법을 배우라는 뜻으로 어머니가 1년 학비와 생활비를 몽땅 부쳐줘 주식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그 이후 강의를 들어도 주식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에 가장 관심이 가고 해서 명동 증권가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학원생이던 1984년 마침내 조그만 사설 투자자문회사를 설립했다. 증권 투자로 번 돈으로 서울 회현동 코리아헤럴드 빌딩 18층에 20평 남짓한 사무실을 얻었다. 직원도 한 명 두었다. 그때가 26세였으니 타고난 투자가인 셈이다.
본격적으로 금융투자업에 뛰어든 것은 동양증권에 입사한 1986년.그의 명성을 익히 듣고 특채하겠다는 증권사도 있었지만 마다하고 동원증권 영업부 사원으로 입사했다. 증권가 최고 스타였던 이승배 당시 동원증권 상무의 영업 스타일과 브로커로서의 자세를 배우고 싶었던 그는 여러 차례 문전박대를 이겨내고 입사에 성공했다.
그로부터 불과 45일 뒤 대리로 승진하는 특유의 실력을 발휘했다. 코스피지수가 처음으로 1000선을 돌파한 뒤 곧바로 폭락세로 돌아서 모든 사람들이 지점 근무를 기피하던 1989년 박 회장은 지점장을 자원했다. 당시 지점 훈이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앞으로 달려나가는 것이다'였다. 젊은 박현주는 꿈을 현실로 만들고자 '바람개비'를 돌리듯 저돌적으로 돌진했다. 그는 노무라증권의 '퀵 영(Quick Young) 전략'을 벤치마킹해 패기만만한 젊은이들로 영업 진용을 새로 짰다. 그의 전략이 맞아떨어져 동원증권 중앙지점은 1993년 1조4000억원의 주식 약정(매매 체결액)을 올리며 전국 1위 지점으로 부상했다. 이른바 '박현주 신화'의 시작이었다. 이듬해 압구정지점장이 돼서는 2년 연속 전국 증권사 지점 중 약정액 1위라는 전무후무한 기록도 세웠고,1995년엔 최연소로 강남본부장 겸 이사로 발탁됐다.
하지만 1997년 6월 박 회장은 당시 구재상 압구정지점장,최현만 서초지점장 등 8명의 '박현주 사단'과 함께 잘 나가던 자리를 박차고 나와 미래에셋캐피탈을 세웠다. 1998년 12월에는 미래에셋자산운용을 설립하고 자신의 이름을 내건 국내 최초의 뮤추얼펀드 '박현주 1호'를 출범시켰다. 500억원 규모로 출범한 '박현주 1호'는 2시간30분 만에 판매를 마감하는 기록을 세웠으며,수익률도 100%를 넘겼다. 뮤추얼펀드가 성공하자 다른 자산운용사들도 유사 상품을 앞다퉈 내놓는 등 뮤추얼펀드 붐을 일으켰다.
적립식 펀드의 대중화를 이끌며 은행 예금 위주의 저축문화를 2004년 이후에는 적립식 펀드 위주의 투자문화로 바꾸는 데도 기여했다. 2005년에는 생명보험사를 인수해 미래에셋을 증권,자산운용,보험으로 짜인 투자전문그룹으로 도약시켰다.
시련도 있었다. 손대는 일마다 승승장구하던 박 회장은 2007년 말 최고 시험대에 섰다. 그해 10월 말 시중 자금을 싹쓸이하며 펀드 시장에 돌풍을 일으켰던 '인사이트펀드'가 대규모 손실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한 달 만에 4조원어치가 팔렸지만,정확히 6개월 후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수익률이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그는 뚝심으로 투자자들을 설득했고 인사이트펀드는 원금을 회복해갔다.
박 회장은 2010년을 '글로벌 경영 원년'으로 삼고 "10년 안에 미래에셋을 글로벌 컴퍼니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이번 아큐시네트 인수도 그의 글로벌화에 대한 노력의 결실이란 평가다. 박 회장은 이제 '아시아를 선도하는 글로벌 금융사'라는 목표를 향해 누구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신화를 해외 시장에서 써내려가고 있다.
유병연 기자 yoob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