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팔이 부자연스러웠다. 알고 보니 깁스 상태였다. "다음주면 공연인데 큰일이에요. 며칠 전 욕실에서 미끄러졌는데 뼈가 많이 부러져서 깁스에 압박붕대까지 했습니다. 모양이 좀 우습죠.나을 때까지 6~8주 걸린대요. 얼마나 공들여서 준비한 공연인데,리허설도 더 지켜봐야 하고… 아휴."

오는 27~29일 예술의전당 무대에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올리는 박수지 수지오페라단장(45).대형 공연을 앞두고 얼마나 마음이 쓰였을까. 예전처럼 무대에서 노래만 한다면 모를까,기획 · 제작에 예술총감독까지 맡은 단장으로서 신경써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도 그는 씩씩해 보였다. 175㎝의 훤칠한 키에 서구적인 마스크.패션 감각도 돋보였다.

숙명여대 성악과와 이탈리아 비발디 국립음악원을 졸업한 그는 2009년 프리미엄 클래식 무대를 모토로 수지오페라단을 창단했다. 그해 11월 창단 기념공연 '그란 갈라 콘서트'와 지난해 3월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12월 '카르멘 갈라'로 국내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지난달 이탈리아에서 열린 주세피나 코벨리 국제 콩쿠르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성악가의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이다.

"가족 중 음악을 전공한 사람은 없었어요. 제가 3녀1남 중 장녀인데 사업하는 아버지가 음악은 절대 안 된다고 말렸죠.그냥 피아노나 치면서 보통 아이들처럼 자랐습니다. 사춘기에는 다들 가요나 팝송을 듣잖아요. 그런데 저는 우리 가곡이 그렇게 좋았어요. 자연스럽게 따라 흥얼거렸죠.고1 때 음악 선생님이 목소리가 좋다고 성악을 권했어요. 그 선생님이 지금 황성호 한국예술종합학교 작곡과 교수님이죠.아버지께 말씀드리니까 또 반대하셨어요. 마침 성악하는 친구가 있어서 레슨받을 때 몰래 따라갔다가 그 선생님이 좋은 소리를 갖고 태어났다며 또 권유하기에 집에 가서 졸랐죠.아버지는 끝까지 반대하셨어요. 엄마가 몰래 레슨을 보내주셔서 학업과 레슨을 병행했죠."

집안의 반대에도 그의 여동생 둘은 음악을 전공했다. 둘째 경아 씨는 서울대 음대 작곡과를 졸업했고 셋째 인애 씨는 미국에서 피아노를 공부하고 있다. 남동생만 법학을 택했다.

"대학 들어가서 원망 많이 했어요. 동생들은 안 말리고 저한테만 그런다고.한참 방황하다 의상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종로에 있는 국제복장학원에 다니면서 음악과 패션을 또 병행했는데 이탈리아 밀라노로 유학갔을 때까지도 두 가지를 놓고 고민했어요. 결국 성악으로 마음을 굳힌 게 잘한 것이지만요. "

그는 베르디 국립음악원의 좁은 문을 통과한 뒤 죽기살기로 노래에 매달렸다. 스승을 따라 비발디 국립음악원으로 전학,졸업한 뒤에도 베르첼리 음악학교에서 또 공부했다.

"유학 기간이 제 인생을 통틀어 가장 치열하게 산 시기였을 거예요. 아버지에게 뭔가 보여드리고 싶었죠.제가 이 분야에서 할 수 있는 걸 증명하고 싶기도 했고요. 1년 동안 예비학생처럼 공부하다 시험을 통과해야 학년을 배정받는데 잘 못하면 2학년,가장 잘하면 5학년을 받아요. 저는 '미친 듯' 몰입해서 다행히도 4학년을 받았습니다. 뛸듯이 기뻤죠.시험 친 학생이 그날 10명이었는데 떨어진 친구가 서너 명이고,대부분 2학년을 받았더군요. "

졸업할 때까지 그는 잇몸이 부어 밥을 못 먹을 정도로 매진했다. 그 덕분에 "귀국하지 말고 여기 극장에 들어가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일단 키가 크고 서구적인 얼굴에 메조소프라노니까 '삼손과 데릴라' '카르멘' 등에 잘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에이전시의 제안도 많았다.

그러나 그는 1994년 말 귀국했다. 이듬해 2월에는 국내 첫 독창회를 가졌다. "안형일 이경숙 교수님 등이 보시고 공부 잘 하고 왔다고 하시더군요. 국립오페라단의 '더 메디움(무당)'이라는 작품에 오디션을 보라고 해서 독창회 이틀 뒤에 봤는데 1등을 차지했어요. 데뷔 무대가 열린 거죠."

모교의 강사를 거쳐 상명대 교수로 재직하던 그가 오페라단을 만들 생각을 한 것은 강단보다 무대가 더 좋았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활동하면서 본 무대 기반이나 환경에 비해 우리는 너무나 열악했어요. 예산이 부족하니까 오케스트라를 최소화하고,무대 세트도 줄이고….정부 지원이 든든한 것도 아니고.감히 제가 한번 해보자고 나선 것입니다. 겁이 나긴 했죠.창단해서 첫 오페라를 공연할 땐 아버지의 지원도 받았어요. 아버지가 이제 이걸 기틀로 삼아서 제대로 할 수 있는 걸 해봐라 그러시더군요. 우리 기업들의 문화에 대한 인식도 많이 좋아졌더라고요. 열린 생각을 가진 경영자들도 많고.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을 비롯한 우리 협찬사 대표들도 음악을 좋아하고요. 이번에는 작년보다 표가 3배나 많이 팔렸어요. "

하긴 '프리미엄급'을 고집하는 그가 '안 하면 안 했지,하면 제대로 한다'는 각오로 덤비니까 그럴 만도 하다.

"능력이 안 되면 차라리 쉴지언정 대충 흉내내거나 그러지는 말자고 우리 단원들과 얘기하죠.저는 젊은 관객들까지 흡수하고 싶어요. 그게 오래 갈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하죠.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무대와 좋은 가수를 통해 아,클래식이 이런 거구나 하는 걸 가슴 찡하게 느끼도록 해줘야 해요. 그래야 어른이 되어서도 감동이 남잖아요. 이번 작품 주역인 마리엘라 데비아는 당대 최고의 성악가입니다. 몇 년째 '라 트라비아타'를 계속하고 있는데 한 세기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한 벨칸토 창법을 구사하는 분이죠.어떻게 하기에 소프라노로 가장 어려운 걸 소화하는지….정말 대단해요. 어렵게 섭외했는데 참 잘한 선택인 것 같아요. "

이런 생각은 협찬사를 선택할 때도 적용된다. "국내 최고 기업들과 수지오페라단이 서로 윈윈하면서 함께 간다는 거죠.그 때문에 가끔은 아깝게 놓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프리미엄 전략을 견지하고 싶어요. "

그도 협찬사들을 돕는 데 적극적이다. 지난해 메인 스폰서였던 푸르덴셜생명이 이달 말 후원하는 한국메이크어위시재단(난치병 아동 후원단체) 돕기 자선골프대회에 성금을 내고 프레지던트석과 VVIP석 공연 티켓 100여장을 기부한다.

이탈리아 콩쿠르 심사위원에 선정된 것도 마찬가지.'나비부인'과 '카르멘 갈라' 공연 때 초청받은 해외 아티스트들이 수지오페라단의 운영 시스템을 눈여겨 보고 좋은 인상을 갖고 갔다가 그를 초청한 것이다.

"프로페셔널하게 하는 게 믿을 만하고 장래성도 있다고 봤나 봅니다. 그들의 얘기가 콩쿠르 심사위원장의 귀에 들어갔던 거죠.마리아 키아라라는 대가인데 그분이 저를 아시아 대표로 초청했습니다. 안드레아 보첼리가 초대손님으로 와서 피날레를 함께 보고 연주도 했어요. 내년에도 스케줄만 허락하면 가고 싶습니다. 한국인이 굉장히 많았어요. 공동 2위와 3위를 우리나라가 차지했지요. 심사위원이 5명이었는데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죠.한국 친구들이 무대에 올라오면 살짝 미소를 지어주거나 손짓을 작게 해줬는데 크게 안심이 됐나봐요. 뿌듯하더라고요. 스페인 콩쿠르 심사위원으로도 와 달라고 하니까 저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죠."

만난사람 =고두현 문화부장 kdh@hankyung.com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27~29일 예술의전당서

수지오페라단이 오는 27~29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 올리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는 베르디의 대표작이다.

이번 공연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주인공 비올레타 역을 맡은 마리엘라 데비아(63).그는 이탈리아 최고의 소프라노로 손꼽히는 성악가다. 특유의 벨칸토 창법과 능숙한 고음 처리,안정감 있는 성량으로 클래식 팬들을 사로잡고 있다.

로마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을 졸업한 그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과 런던의 로열 코벤트,밀라노의 라 스칼라 등 세계적인 극장에서 공연하며 '영혼을 울리는 성악가'라는 찬사를 받았다. 국내에도 팬이 많다. 2004년과 2008년 독창회로 국내 무대에 오른 적은 있지만 오페라 작품으로는 이번이 처음이다.

데비아와 함께 비올레타 역에는 소프라노 이리나 드브로프스카야와 나탈리아 로만이 캐스팅됐다. 남자 주인공 알프레도 역은 테너 살바토레 코르델라와 마리오 말라니니,연출은 이탈리아 리보르노 극장 예술감독인 알베르토 팔로시아,지휘는 로베르토 자놀라가 맡는다. 연주는 프라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뒤마의 소설 '춘희'를 원작으로 한 '라 트라비아타'는 파리 사교계의 고급 창녀 비올레타가 귀족 청년 알프레도를 사랑하지만 자신의 처지 때문에 그의 곁을 떠나 괴로워하다 결국 폐렴으로 죽는다는 비극적인 내용이다.

'라 트라비아타'는 '길을 벗어난 타락한 여인'이라는 뜻으로 비올레타를 가리키는 말이다.

대표곡 '축배의 노래' '언제나 자유롭게' '아,그대인가' '지난날이여,안녕' '사랑하는 이여,파리를 떠나서' 등의 선율이 아름답고 깊이 있다. 공연 시간은 27일 오후 8시,28일 오후 3시와 8시,29일 오후 4시.(02)542-0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