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금융감독원은 전날 밤 발표된 국실장 인사로 하루 종일 술렁였다. 직원들은 "파격을 넘은 충격적 인사"라거나 "권역의 벽을 완전히 파괴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번 인사는 은행 증권 보험 등 3개 권역의 '에이스급' 국실장들을 완전히 뒤섞는 '초유의 사건'으로 평가된다. 1999년 통합 금융감독원이 출범한 이후 '전공'에 맞춰 보직을 줬던 관행을 무시했다. 국실장 55명 중 85%인 47명이 바뀌었다. 권역별 주무국장은 대부분 해당 분야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로 교체됐다. 자신의 주무대가 아닌 권역에서 핵심 보직을 받은 한 국장은 "솔직히 회사를 새로 옮긴 것이나 다름없다. 이 분야를 잘 모른다"고 말하기도 했다.

직원들의 잇단 비리와 저축은행 감독 · 검사 부실로 여론의 질타가 이어지는 와중에 나온 전격적인 인사에는 권혁세 원장(사진)의 결단이 있었다. 권 원장은 지난 28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추락한 감독기관의 신뢰를 되찾기 위한 선택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4개 기관을 합친 지 10년이 지나도록 통합기관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며 "자신이 속한 권역의 직원들과 업계를 감싸는 온정주의가 만연해 있는데,내가 있는 동안 반드시 진정한 통합기관의 모습을 만들어 놓겠다"고 말했다.

권 원장은 "고인 물은 썩는다"는 말로 인사 배경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각 권역에서 오래 일하면서 업계와 유착했고,검사를 나가서도 (문제점을) 잡아내지 못했다"며 "실력 있는 에이스급 국장들부터 새로운 권역에 보내 소신 있게 검사하고 감독할 수 있도록 (인사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조직에서 인정받는 주무 국장들에게 새 권역에서 변화와 혁신을 주도하는 역할을 맡기겠다는 얘기다.

그는 "나도 예전에 (재무부) 세제실에서 일하다가 금융 분야로 옮겨왔다"며 "금감원에서 20년 이상 일한 국장 정도 되면 어디로 가도 잘할 수 있다"고 단언했다.

감독 부실 비판에 직면한 저축은행 사태에 선제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이유도 직원들이 '권역의 벽'에 막혀 고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신용관리기금 출신들이 주로 저축은행을 돌아가며 담당하다 보니 검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금감원 출범 초기인 2000년에도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이 '화학적 결합'을 위한 인사를 시도한 적이 있다. 하지만 '전문성이 약화된다'는 내부의 반발 등에 막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권 원장은 "직원들이 전문성을 이유로 반대하면 국장들이 임원들에게 찾아가 반대하고,임원들은 원장에게 와 '그렇게 하면 곤란하다'고 얘기해 (전직 원장들이 권역을 무시하는 인사를) 못했던 것"이라며 "이런 시도가 있을 때 마다 전문성을 얘기 하는데 전문성은 부국장과 팀장들이 보완하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권 원장은 유능한 일부 팀장과 수석조사역들을 다른 권역의 핵심 보직으로 보내는 후속 인사도 강력히 밀어붙이겠다고 덧붙였다.

이번 인사에선 저축은행과 기업공시 담당 부서장 전원이 물갈이됐다. 내부에선 김준현 전 저축은행서비스국장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물러난 것 아니냐는 동정론도 일었다. 권 원장은 이에 대해 "이번에는 어쩔 수가 없다"며 "좀 시간을 두고 반드시 명예회복을 시켜주겠다"고 말했다.

앞으로 권역을 넘나드는 인사가 계속되면 금감원 고위 간부들은 금융회사에 감사로 나가는 게 어려워질 전망이다. 퇴직일을 기준으로 직전 3년간 수행했던 업무와 유관한 분야에는 퇴직 후 2년간 취업할 수 없도록 돼 있는 규정을 피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금감원 고위 관계자는 "앞으로 조직 차원에서 감사로 내보내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각자 알아서 살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류시훈 기자 bada@ha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