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의결권 문제에 대해 다시 정리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국민연금은 결코 기업 의사결정을 좌우하는 의결권자가 돼서는 안 된다. 아니 될 수 없다. 국민연금은 임금의 9%(근로자 4.5%,기업주 4.5%)를 떼어 강제 저축하게 한 전 국민의 노후 대비 적립금이다. 정부는 관리자,다시 말해 대리인이다. 의결권 행사가 최소화돼야 하고,하더라도 중립적으로 행사돼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더구나 지배구조 개선이 시급한 곳은 정부가 낙하산 인사로 망쳐 놓은 공기업들이다.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은 투자자와 기업가의 차이도 잊고 있다. 누구든 1주 1표요,대주주와 소액주주가 같다는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맞는 말일까? 아니다. 주식 투자자와 대주주는 그 본질이 전혀 다르다. 아니 같을 수가 없다. 투자자의 목표는 단기 배당 혹은 시세차익의 극대화다. 국민연금도 수익 극대화가 운용목표다. 자본 이득을 추구하는 투자자의 의사결정은 주식을 시세에 따라 팔고사는 것이 기본 전략이다. 주총에서의 표대결 이전에 주식을 사고파는 것으로 투자전략에 대한 찬반 의사를 표시한다. 떠나면 그만인 유한책임이다.

그러나 기업가는 다르다. 그는 기업을 성장시켜 장기가치를 끌어올리는 목적을 수행하는 무한 투자자다. 시세차익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시세차익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 국가들은 대주주에게 차등의결권이나 황금주 혹은 포이즌 필을 허용한다. 워런 버핏이 보유한 클래스 A주식은 의결권이 1만5000개다. 구글도 대주주는 1주당 의결권이 10개다. 바로 여기서 소액주주와 대주주의 차이가 극명해진다. 미국 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졌다고 말할 때의 위기란 바로 증권 자본주의의 위기다. 대리인들이 주인처럼 설치다 망한 것이 바로 엔론,월드콤이고 경영자가 단기 주가 상승만을 부추긴다고 지적할 때의 상황이 바로 곽 위원장이 지금 시도하겠다는 연금 동원령이다. 대리인 문제를 극대화하는 통로다.

국민연금과 같은 공동기금은 언제나 리스크 회피를 투자의사 결정의 본질로 삼는다. 주어진 투자 안건에 대한 찬반 의사 표시를 넘어서는 창의적 투자안을 작성하는 사람을 우리는 기업가라고 부른다. 만일 연금이 적극적 투자의사 결정을 내리려면 연금 가입자들의 총회를 열어 2000만 가입자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기금운용위원회가 삼성전자 사장을 밀어내고 뉴 갤럭시 투자안을 여의도 광장에서 개최할 가입자 총회에 올릴 수 있다고 보는 모양이다. 참 상상력이 기발한지 바닥인지.

국민연금의 지배구조를 개선하면 된다는 주장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국민연금이 국민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려면 가입자 총회를 열어야 하지만 이는 불가능하고 유일하게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조직은 국회밖에 없다. 결국 국회는 다수당,소위 권력이 지배하고 연금과 상장기업들은 자연스레 권력의 지배를 받게 된다. 청와대는 지금 커튼 뒤에 숨어 여론만 살피고 있다. 이것은 이념과 사상이 문제가 아니라 지식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