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전 빚내 공장 차려 年매출 50억 强小회사 키워
독하게 기술 배운 子
화학약품에 손등 짓무르며 2년만에 최고 도금 전문가로
"형님과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창업했어요. 형님 밑에서 편하게 일해도 되는데 그러고 싶지 않아 아파트 담보대출부터 받았습니다. "(이정희 정훈금속 대표 · 55)
"대학 졸업보다 가업을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아버지 일을 물려받겠다고 했다가 엄청 혼났어요. 하지만 부모님은 끝내 저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이지훈 정훈금속 대리 · 24)
경기도 시화공단에 있는 정훈금속의 도금라인.자동차 부품을 전문으로 도금하는 이 공장엔 아버지와 어머니,아들까지 일가족이 생산라인에서 얼굴을 맞대고 일한다. 한창 놀러다닐 때 공장에서 화학약품과 씨름하는 아들이 안쓰럽다는 아버지.여태껏 아들 등을 한번도 토닥이지 못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화학약품에 손을 담그는 아들. "도금기술은 화상흉터가 남더라도 감각으로 느껴야 한다"는 게 아들 생각이다. 이 회사는 연간 50억원대의 매출을 올리지만 크롬 수은 납 등을 넣지 않고 도금하는 친환경 삼가아연도금 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기술력을 가진 기업으로 꼽힌다.
◆아내와 공장서 밥지어 먹으며 키운 회사
전문대를 중퇴하고 1977년 염색공장에 취직했던 이정희 대표가 도금과 인연을 맺은 것은 형님이 운영하는 도금공장에 입사한 1986년부터다. 영업을 책임졌던 이 대표는 틈나는 대로 도금기술을 익혔다. 형님과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파트 담보대출과 처갓집,지인들한테 빌린 6000만원으로 인천 십전동에 330㎡ 남짓한 임대공장을 빌려 1995년 아연도금 공장을 차렸다. 처음 2년간은 일감이 없어 고생했다. 형님 회사는 니켈도금을 전문으로 해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직원 월급을 주기 위해 은행빚과 사채까지 써야 했다.
아내인 김숙자 부사장(52)은 한푼이라도 아끼겠다며 창업 이듬해부터 회사에 나와 직원들 점심을 해 주고 공장청소를 했다. 이젠 숙련공이 돼 기술을 총괄하는 '현장 누님'으로 불린다. 이 대표는 "한겨울에 직원 작업복을 찬물로 빠는 바람에 아내는 겨우내 동상으로 고생했다"며 "여태껏 아내에게 백화점에서 옷 한 벌 사 주지 못했다"며 겸연쩍어했다. 김숙자 부사장은 "유치원 보낼 돈이 없어 공장 한켠에 공간을 마련하고 두 애들을 놀게 했는데 쇳덩이를 장난감 삼아 놀았던 것을 회상하면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다"며 말끝을 흐렸다.
◆이제야 빛보는 친환경 도금기술
외환위기는 이 회사에 도약의 발판이 됐다. 경유차 판매가 늘면서 자동차부품 도금 주문물량이 밀려들었다. 주간작업은 주야 2교대로 바뀌었고 매출도 덩달아 늘어 매월 1억원을 넘겼다. 하지만 2005년 45억원을 투자해 시화공단으로 확장 이전하면서 경영난에 허덕였다. 그 해부터 자동차 업계가 원가경쟁에 돌입하면서 '시련의 계절'을 만났다. 완성차업체들이 아연도금보다 비용이 덜 드는 복합도금(페인트 코팅후 열처리로 마감)을 채택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1년쯤 지나자 복합도금의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다시 아연도금 시장이 형성됐다. 이 대표는 "복합도금은 나사골(고랑)에 코팅제가 고이는 떡짐현상이 생겨 조임기능이 제대로 안됐다"고 말했다. 그는 "작년 말 60% 수준에 머물렀던 가동률은 아연도금 요청이 늘어 잔업과 휴일 특근까지 할 정도로 바빠졌다"고 덧붙였다.
최근 들어 이 회사는 2002년 국산화해 에어컨용 볼트 100만개를 도금했던 친환경 방식의 일명 '삼가아연도금'의 요청이 늘고 있다. 이 대표는 "유럽 등 해외에서 크롬 수은 납 등이 미함유된 친환경 도금제품 사용을 강화하면서 올 들어 회사를 찾는 기업들도 부쩍 늘었다"고 소개했다. 그는 "올해는 삼가아연도금 물량이 전체 매출의 30%를 넘길 것"이라고 전망했다.
◆대학 중퇴하고 현장서 가업잇는 아들
한서대 국제통상학과에 다니던 이지훈 대리는 군대를 제대한 2009년 말 입사했다. 2학년 중퇴.학기 중이거나 군복무(공익요원) 중에도 쉬는 날이면 회사에서 도금기술을 배웠다.
이 대리는 "휴일도 없이 일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면 마음이 아팠다"며 "대학을 중퇴하면서까지 가업을 잇겠다고 결심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반대는 극심했다. 이 대표는 "고생길이 훤한데 힘든 일을 결코 대물림할 수 없었다"며 아들의 가업승계를 반대했다.
입사 후 이 대리는 '독종'이었다. 화학약품에 손등이 짓무르고 얼굴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실험에 매진했다. 그 결과 2년 만에 국내 최고의 아연도금 전문가로 인정받는 영광을 얻었다. 작년 말 정부가 실시한 '뿌리기술경진대회'의 표면처리 아연도금 분야에서 최고상인 지식경제부 장관상을 탔다. 이 대리는 "경진대회 참가를 위해 4개월 동안 일과를 마친 오후 7시부터 자정까지 매일 실험실에서 도금과 씨름했다"고 말했다.
"아버지와 갈등 같은 것은 없어요. 기술 배우기도 바쁘거든요. 세계 최고의 아연도금 기술을 가진 강소기업으로 키우는 게 제 꿈입니다. "(이 대리)
시화공단=이계주 기자 leer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