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 뒤집어 읽기] '교역 디아스포라' 꽃피운 아르메니아 商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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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최대 글로벌 무역 네트워크
전세계로 흩어진 동족 상인과 연대…유럽·아시아·아프리카 교역망 구축
거래비용 줄이려고 환어음 발행도
전세계로 흩어진 동족 상인과 연대…유럽·아시아·아프리카 교역망 구축
거래비용 줄이려고 환어음 발행도
세계사에는 일찍부터 활발하게 해외 상업 활동을 벌인 민족들이 많다. 아랍 상인들이나 유대인들,혹은 화교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이방인 세계에 뚫고 들어가 거류지를 만들어 한편으로 현지인들과 거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족 상인들과 사업 관계를 유지했다. 이렇게 형성된 상업 거점들을 서로 연결해 네트워크를 이루면 강력한 상업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교역 디아스포라(trading diaspora · 교역 이산공동체)'라고도 불리는 이런 방식을 극단적으로 확대시킨 민족이 아르메니아인들이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경제적으로는 오히려 페르시아를 식민화한 것과 다름없었다. 샤(페르시아 황제)는 이들을 에스파한의 외곽지역인 줄파(Julfa)에만 살도록 규제했지만,아르메니아 상인들은 이곳을 거점 삼아 전 세계로 약진했다. 그들은 우선 인도의 광대한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인도 남부의 포르투갈령 고아에서 유럽 상인들과 거래하는가 하면,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라사에 거류지를 만들고 이곳에서부터 1500㎞나 떨어진 중국 국경 지역까지 진출했다.
이들은 곧 스페인령 필리핀에 모습을 드러냈고,반대 방향으로 터키 제국 내에서도 유대 상인들과 경쟁했다. 모스크바공국에서도 회사를 만들어 페르시아의 비단을 들여와 판매했다. 이 비단 제품들은 북극권에 가까운 아르항겔스크를 포함해 러시아 전역에 팔려 갔다. 곧 모스크바로부터 스웨덴으로 진출해 들어간 다음 이 지역과 암스테르담 간 교역로를 통해 서유럽으로 상품을 수출했다. 이제 유럽의 각 지역에 이들의 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
17세기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남부 각 지역에 아르메니아 상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대량 반입하는 비단 제품은 현지 상인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1623년 마르세유의 기록에는 아르메니아 상인들을 이렇게 표현한다. "이들보다 더 탐욕스러운 민족은 없을 겁니다. 이들은 알레포,스미르나 등지에서 비단을 팔아 큰 이익을 보면서도 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세상 끝까지 달려갑니다. "
1649년 프랑스 함대가 몰타 섬 근처에서 영국 배 한 척을 나포해 놓고 보니 그 안에는 400통의 비단이 있었다. 이것은 그 배에 탄 64명의 아르메니아 상인이 리보르노와 툴롱으로 수송하는 상품이었다. 그 외에도 아르메니아인들은 포르투갈,세비야,카디스,심지어 아메리카의 여러 항구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인도의 고아로부터 스페인의 카디스 항구까지 이동하는 한 아르메니아 상인의 기록을 보면 그들만의 네트워크를 이용해 세계 각 지역을 전전해 다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실제 활동 모습은 어땠을까. 리스본의 국립도서관에서 발견된 아르메니아인 대리인의 상업 여행 일지는 이들의 활동이 얼마나 넓은 지역에 걸쳐 이뤄졌는지를 증언한다.
'다비드의 아들 호반네스'라는 이름의 이 상인은 줄파의 한 자본주와 사업 계약을 맺었다. 호반네스는 '후원자'로 불리는 이 사람에게서 자금을 받아 비즈니스 여행을 수행하며,이익이 발생하면 자신이 4분의 1을 받고 나머지를 자본주에게 주기로 했다.
이 기록은 불행하게도 후반부가 유실돼 과연 이 거래가 최종적으로 어느 정도의 수익을 올렸는지를 알 수는 없지만,현재 상태만으로도 아르메니아 상인들의 실체를 여실히 들여다볼 수 있다.
이 여행은 1682년부터 1693년까지 11년이나 걸렸으며,총 여행 거리는 수천㎞에 이른다. 그는 줄파를 출발해 수라트(인도 구자라트 지방의 항구)로 갔다가 여러 도시를 거쳐 티베트의 라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다시 시라즈,아그라,파트나,카트만두 등지를 돌아다닌 후 라사로 귀환했다. 그는 방문지마다 동향인들의 영접을 받으며 그들과 비즈니스를 수행했다.
그가 취급한 상품은 금,은,보석,사향,인디고,면직물,차 등 다양했다. 그 중에는 인디고 2t을 인도 북부에서 수라트로 가져왔다가 시라즈로 보낸 일도 있고,100㎏의 은을 거래한 일도 있다. 이런 사업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크레디트 거래가 필수적이다. 자금 융통을 위해 그는 여러 차례 환어음을 발행했다.
아시아 내륙의 광대한 지역을 돌아다니는 호반네스의 사업은 상품과 현찰,어음 등이 얽힌 복잡한 거래의 연속이었다. 이 사업은 방랑기 많은 어느 한 상인의 유별난 행위였을까. 그렇지는 않다. 호반네스의 활동이 예외적인 사례가 아니라는 것은 거의 100년 뒤에 나온 아스트라한의 아르메니아 법령에 똑같은 내용이 기록돼 있다는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르메니아 상인들의 사례는 두 가지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첫째,유라시아 대륙 거의 전체를 포괄하는 교역 조직망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이 세계는 상인과 자본,상품이 오가는 '뚫고 들어갈 수 있는(penetrable)' 곳이었다. 둘째,아시아의 상업 기반이 생각보다 탄탄하게 갖춰져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한때 유럽 학자들은 아시아의 상업 세계를 수없이 많은 소규모 '행상인(pedler)'들이 돌아다니는 초라한 곳으로 그렸다. 장돌뱅이들의 보따리 장사 수준이니 유럽식의 자본주의 발전은 애초에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관찰에 불과하다. 호반네스의 사례를 보면 그의 사업 규모가 매우 크고 사업 방식이 상당히 정교하게 발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례로 인도에서 환어음을 이용해 단거리 자산 이동을 하는 경우 한 달 이자비용이 0.75%로 지극히 저렴했다. 아시아 상업 세계는 이방인이 피상적으로 보기보다는 훨씬 발달해 있었으며,이 기반 위에 아르메니아인을 비롯한 여러 상업 민족들은 초장거리 상업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 있었다.
주경철 <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
이들은 이방인 세계에 뚫고 들어가 거류지를 만들어 한편으로 현지인들과 거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족 상인들과 사업 관계를 유지했다. 이렇게 형성된 상업 거점들을 서로 연결해 네트워크를 이루면 강력한 상업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교역 디아스포라(trading diaspora · 교역 이산공동체)'라고도 불리는 이런 방식을 극단적으로 확대시킨 민족이 아르메니아인들이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경제적으로는 오히려 페르시아를 식민화한 것과 다름없었다. 샤(페르시아 황제)는 이들을 에스파한의 외곽지역인 줄파(Julfa)에만 살도록 규제했지만,아르메니아 상인들은 이곳을 거점 삼아 전 세계로 약진했다. 그들은 우선 인도의 광대한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인도 남부의 포르투갈령 고아에서 유럽 상인들과 거래하는가 하면,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라사에 거류지를 만들고 이곳에서부터 1500㎞나 떨어진 중국 국경 지역까지 진출했다.
이들은 곧 스페인령 필리핀에 모습을 드러냈고,반대 방향으로 터키 제국 내에서도 유대 상인들과 경쟁했다. 모스크바공국에서도 회사를 만들어 페르시아의 비단을 들여와 판매했다. 이 비단 제품들은 북극권에 가까운 아르항겔스크를 포함해 러시아 전역에 팔려 갔다. 곧 모스크바로부터 스웨덴으로 진출해 들어간 다음 이 지역과 암스테르담 간 교역로를 통해 서유럽으로 상품을 수출했다. 이제 유럽의 각 지역에 이들의 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
17세기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남부 각 지역에 아르메니아 상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대량 반입하는 비단 제품은 현지 상인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1623년 마르세유의 기록에는 아르메니아 상인들을 이렇게 표현한다. "이들보다 더 탐욕스러운 민족은 없을 겁니다. 이들은 알레포,스미르나 등지에서 비단을 팔아 큰 이익을 보면서도 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세상 끝까지 달려갑니다. "
1649년 프랑스 함대가 몰타 섬 근처에서 영국 배 한 척을 나포해 놓고 보니 그 안에는 400통의 비단이 있었다. 이것은 그 배에 탄 64명의 아르메니아 상인이 리보르노와 툴롱으로 수송하는 상품이었다. 그 외에도 아르메니아인들은 포르투갈,세비야,카디스,심지어 아메리카의 여러 항구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인도의 고아로부터 스페인의 카디스 항구까지 이동하는 한 아르메니아 상인의 기록을 보면 그들만의 네트워크를 이용해 세계 각 지역을 전전해 다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실제 활동 모습은 어땠을까. 리스본의 국립도서관에서 발견된 아르메니아인 대리인의 상업 여행 일지는 이들의 활동이 얼마나 넓은 지역에 걸쳐 이뤄졌는지를 증언한다.
'다비드의 아들 호반네스'라는 이름의 이 상인은 줄파의 한 자본주와 사업 계약을 맺었다. 호반네스는 '후원자'로 불리는 이 사람에게서 자금을 받아 비즈니스 여행을 수행하며,이익이 발생하면 자신이 4분의 1을 받고 나머지를 자본주에게 주기로 했다.
이 기록은 불행하게도 후반부가 유실돼 과연 이 거래가 최종적으로 어느 정도의 수익을 올렸는지를 알 수는 없지만,현재 상태만으로도 아르메니아 상인들의 실체를 여실히 들여다볼 수 있다.
이 여행은 1682년부터 1693년까지 11년이나 걸렸으며,총 여행 거리는 수천㎞에 이른다. 그는 줄파를 출발해 수라트(인도 구자라트 지방의 항구)로 갔다가 여러 도시를 거쳐 티베트의 라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다시 시라즈,아그라,파트나,카트만두 등지를 돌아다닌 후 라사로 귀환했다. 그는 방문지마다 동향인들의 영접을 받으며 그들과 비즈니스를 수행했다.
그가 취급한 상품은 금,은,보석,사향,인디고,면직물,차 등 다양했다. 그 중에는 인디고 2t을 인도 북부에서 수라트로 가져왔다가 시라즈로 보낸 일도 있고,100㎏의 은을 거래한 일도 있다. 이런 사업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크레디트 거래가 필수적이다. 자금 융통을 위해 그는 여러 차례 환어음을 발행했다.
아시아 내륙의 광대한 지역을 돌아다니는 호반네스의 사업은 상품과 현찰,어음 등이 얽힌 복잡한 거래의 연속이었다. 이 사업은 방랑기 많은 어느 한 상인의 유별난 행위였을까. 그렇지는 않다. 호반네스의 활동이 예외적인 사례가 아니라는 것은 거의 100년 뒤에 나온 아스트라한의 아르메니아 법령에 똑같은 내용이 기록돼 있다는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르메니아 상인들의 사례는 두 가지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첫째,유라시아 대륙 거의 전체를 포괄하는 교역 조직망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이 세계는 상인과 자본,상품이 오가는 '뚫고 들어갈 수 있는(penetrable)' 곳이었다. 둘째,아시아의 상업 기반이 생각보다 탄탄하게 갖춰져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한때 유럽 학자들은 아시아의 상업 세계를 수없이 많은 소규모 '행상인(pedler)'들이 돌아다니는 초라한 곳으로 그렸다. 장돌뱅이들의 보따리 장사 수준이니 유럽식의 자본주의 발전은 애초에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관찰에 불과하다. 호반네스의 사례를 보면 그의 사업 규모가 매우 크고 사업 방식이 상당히 정교하게 발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례로 인도에서 환어음을 이용해 단거리 자산 이동을 하는 경우 한 달 이자비용이 0.75%로 지극히 저렴했다. 아시아 상업 세계는 이방인이 피상적으로 보기보다는 훨씬 발달해 있었으며,이 기반 위에 아르메니아인을 비롯한 여러 상업 민족들은 초장거리 상업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 있었다.
주경철 <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