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조정권 씨(62 · 사진)는 6년 만에 내놓은 시집 《고요로의 초대》(민음사)에서 한결 짙어진 삶의 나이테를 보여준다. 맑으면서도 매서운 정신의 지평을 열어온 그가 이번에는 고요와 불면,겸허 속에서 더욱 치열한 시적 각성을 드러낸다.

시집의 서문을 대신한 글에서 '소란스러움과 서두름 속에서도 늘 평온함을 유지하기를/ (중략) 한때 소유했던 젊음의 것들을 우아하게 포기하고/ 세월의 충고에 겸허히 의지하기를'이라는 막스 헤르만의 글귀를 인용한 데에서도 이런 면은 여실히 드러난다.

맨 앞에 배치된 세 편의 시 '은둔지'와 '신성스러운 불면',표제작 '고요로의 초대'는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달빛과 모기와 먼지들이 소찬을 벌인 지도 오래된' 집에 찾아온 손님도,그를 맞는 것도 모두 '나'다. '많은 집에 초대를 해 봤지만 나는/ 문간에 서 있는 나를/ 하인(下人)처럼 정중하게 마중 나가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그 무거운 머리를 이리 주시고요/ 그 헐벗은 두 손도.'('고요로의 초대' 부분)

비가 나뭇잎의 마른 껍질에 점자를 타이핑하는 밤,불면을 기꺼이 선물로 받아든 시인은 자신이 산타클로스가 돼 '구멍난 양말 신은 채 잠든 마음들'을 찾아가고자 염원한다. '밤이 주는 휘황찬란한 축복은/ 불면./ 불면이야말로 내 안에서 살아왔던 산타클로스./ 김 추기경도 말년을 불면 속에서 살았듯이/ (중략) 마음이 혼자 기댈 곳 없는 자신에게마저도 기댈 수 없는 시간을 계속 더 주신다면.'('신성스러운 불면' 부분)

스스로를 정적의 사유 속으로 초대하는 그의 최종 목적지는 '시(詩)'라는 은둔지다. '시는 무신론자가 만든 종교./ 신 없는 성당./ 외로움의 성전./ 언어는/ 시름시름 자란/ 외로움과 사귀다가 무성히 큰 허무를 만든다. / 외로움은 시인들의 은둔지./ 외로움은 신성한 성당./ (중략) 시인은 1인 교주이자/ 그 자신이 1인 신도./ 시는 신이 없는 종교./ 그 속에서 독생(獨生)하는 언어./ 시은(市隱)하는 언어./ 나는 일생 동안 허비할 말의 허기를 새기리라.'('은둔지' 부분)

자연과 동물,이웃에 건네는 시선에는 애틋함을 숨겼다. 바다에 유출된 원유를 뒤집어쓴 펭귄과 코트가 되기 위해 한꺼번에 시체로 모인 200마리의 밍크('동물에게 진 죄'),어미를 잃고 빗자루를 엄마로 여기는 야생동물원의 새끼 고슴도치들('빗자루'),봉고차에 치여 실려간 연립주택 옥상의 트럼펫 부는 남자('하늘 벤치에서'),국회의사당 정문에서 노래를 부르는 1인 시위자 아주머니('1인 시위')는 시적 서사의 경계를 넘어 커다란 울림을 자아낸다.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