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로 부산 방향으로 내려가다 판교IC 근처에 다다르면 왼쪽에 대형 광고판 하나가 보인다. 국내 전기 · 전선분야 중견그룹인 일진그룹의 '맏형'격인 일진전기가 작년 9월에 설치한 기업이미지 광고다. 광고판에 적힌 문구는 '기술 NO.1 일진전기'.평범한 고속도로 광고판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일진전기에 있어 이 광고판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1968년 창사 이래 최초로 외부에 기업이미지를 알리는 광고이기 때문이다. 일진전기 관계자는 "외부에 회사를 알리기를 꺼렸던 게 지금까지 일진전기의 기업문화"라며 "이번 기업이미지 광고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앞으로 공격적인 투자와 시장공략에 나서겠다는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은둔형 기업' 일진전기가 변신에 나섰다. 40여년간 전선 · 중전기 분야에서 '기술력 좋은 회사'란 평가에 안존했던 모습에서 벗어나 공격적인 투자와 성장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다. 변화의 출발점은 실적이다. 일진전기는 작년 말 사상 처음으로 매출 1조원 고지를 밟았다. 다음 목표는 '2015년 매출 3조원 기업'으로 정했다. 이를 위해 올해부터 충남 홍성에 대규모 부지를 확보, 중전기와 전선공장을 증설하기로 했다. 이달 초 전략기획실과 차세대기술연구원을 신설해 미래 전략기능도 강화했다. 스마트그리드 전기자동차 등 신사업에 진출한다는 비전도 내놨다.

◆국내 유일의 종합 전력기기 회사

일진전기는 일반 소비자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회사이지만 기술력은 업계 최고 수준으로 인정받고 있다. 1968년 '일진금속공업'으로 출발한 뒤 선진국 기업들과의 기술격차를 줄이는 데 주력해온 덕분이다. 여기엔 창업주 허진규 회장의 뜻이 반영돼 있다. 서울대 공대(금속공학과) 출신인 허 회장은 기술입국(技術立國)을 목표로 '남들이 쉽게 개발할 수 있는 건 손대지 않는다'는 지론에 따라 독자기술 개발을 강조해왔다.

이 회사가 만드는 제품은 전선,변압기,모터,펌프,매연저감장치.초고압케이블 등 전선분야는 LS전선 · 대한전선에 이어 3위,변압기 등 전력시스템 분야는 현대중공업 · 효성에 이어 3위에 올라 있다. 회사 관계자는 "아직 세계 시장에는 명함을 못 내밀 정도이고 국내에서도 덩치가 큰 편은 아니지만 전선,개폐기,변압기 등 전기 · 전력분야 풀(full) 라인업을 갖춘 곳은 일진전기가 국내에서 유일하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기술중시 문화는 경영에도 투영돼,일진전기는 본업 이외 사업에는 '한눈' 팔지 않고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그 결과 남보다 더디지만 꾸준한 성장곡선을 그려왔다. 20년간 성장을 거듭해 1990년 311억원이던 매출은 작년 1조400억원으로 처음'1조원 고지'를 돌파했다. 영업이익도 1990년 33억원에서 작년 513억원(증권사 추정치)으로 18배 성장했다.

◆이제는 성장…'매출 3조원 기업'으로

하지만 내실만 기해서는 성장을 이루기 힘들고,경쟁력 악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게 일진전기의 내부 진단이다. 주력사업인 전선 분야가 대표적이다. 업계 3위라고 하지만 시장 점유율은 LS전선(42.6%),대한전선(31.0%)에 턱없이 못 미친다.

이에 따라 올해부터 공격 경영의 고삐를 바짝 죄기로 했다. 우선 충남 홍성에 제2의 집적단지를 만들기로 했다. 1단계로 내년 상반기 완공을 목표로 변압기 등 전력시스템을 만드는 인천공장 두 배 크기의 생산시설을 지을 계획이다. 2단계로 전선공장도 추가 증설할 계획이다. 최진용 일진전기 부회장은 "지금의 생산능력으로는 추가 성장에 한계가 있다"며 "2015년까지 매출 3조원 기업을 만들기 위해 지금보다 생산능력을 3배,5배로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 인수 · 합병(M&A)에도 적극적으로 나설 방침이다. 이를 위해 작년 프랑스 컨설팅회사인 벨류파트너스에 초고압케이블 사업,영국 컨설팅회사 굴덴에 변압기 사업에 대한 컨설팅을 각각 맡겼다. 최 부회장은 "지금 일진전기의 경쟁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라며 "컨설팅 결과를 토대로 성장성이 큰 신흥시장 쪽 중견기업을 인수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사업조직도 대폭 개편했다. 먼저 신성장동력 발굴을 위해 전략기획실을 만들었다. 그동안 부진했던 해외 사업을 확대하고 신성장동력을 발굴하기 위해서다. 차세대기술연구원도 신설했다. 기존 각 사업부 단위 연구소와 달리 이곳에는 5년,10년 뒤 일진전기와 일진그룹을 먹여 살릴 신수종사업과 신기술을 개발하는 임무를 맡길 예정이다.

◆전기차 · 스마트그리드 등 신사업에도 진출

생산시설 확충과 함께 신사업 진출에도 속도를 낼 방침이다. 전기 · 전력 분야 기술력을 토대로 연관성이 높은 분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겠다는 것이다. 일진전기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신사업은 전기자동차 완성차 분야다. 배터리 사업을 시작으로 컨버터 등 컨트롤시스템 개발,완성차 제조까지 3단계로 사업을 진행할 계획이다.

1단계인 배터리 사업에선 이미 가시적 성과를 내고 있다. 작년 2차전지 핵심 소재인 규소(Si) 음극활물질 특허를 신청한 것.규소 음극활물질은 기존 흑연 음극활물질에 비해 전기 저장용량이 4배 이상 큰 소재다. 국내에선 아직까지 이 소재를 개발한 곳이 없다.

최 부회장은 "배터리를 시작으로 2015년 고속 주행을 하는 전기자동차 완성차 제조사업에 뛰어들 생각"이라며 "우리가 보유한 기술을 활용하면 시장에서 경쟁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올 상반기 중 전기자동차 사업에 대한 계획을 만들어 내놓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진전기는 지능형 전력망으로 통하는 스마트그리드사업에도 진출할 방침이다. 이미 작년부터 정부가 추진 중인 제주도 스마트그리드 실증단지 구축사업에 원격검침시스템(AMI) 100대와 충전기 2대를 설치하는 사업자로 참여했다. 최근엔 한국철도공사와 15억원 규모의 AMI 구축계약도 맺었다. 신재생에너지용 부품 사업에도 진출한다. 풍력발전에 쓰이는 모터와 발전기,변압기,케이블 등을 만들겠다는 전략이다.

이태명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