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2009 북미 국제 오토쇼'.언론의 관심은 GM 부스에 쏠렸다. 세계 첫 양산형 전기자동차인 '시보레 볼트'의 배터리 공급업체가 발표될 예정이었다. 사진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 속에 등장한 릭 왜고너 당시 GM회장은 "볼트의 배터리는 한국 LG화학에서 공급받게 된다"고 발표했다. 왜고너 회장이 행사장에 있던 김반석 LG화학 부회장을 소개하자 500여명의 관계자들 사이에선 박수가 터져 나왔다. 전기차 배터리 분야에서 LG화학의 위상을 재확인해주는 순간이었다.

◆자동차 배터리 세계 선두

LG화학이 리튬이온 2차전지 연구를 시작한 때는 1995년.소니,파나소닉,산요 등 일본 업체들이 니켈수소 전지를 앞세워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였다. LG화학은 값은 비싸지만 저장 용량이 커 성장 가능성이 높은 리튬이온 전지로 승부를 걸었다.

제품 개발 2년 만인 1997년 시제품 생산에 성공하고,1999년엔 국내에서 처음으로 소형 리튬이온 2차전지 대량생산 체제를 구축했다. 이어 2000년에는 미국 콜로라도에 연구법인 LG CPI를 세우고 자동차용 배터리 시장에 뛰어들었다. CPI 대표로는 GM이 만든 최초의 전기차 ECV1의 배터리 설계를 총지휘했던 다니엘 리버스 박사를 스카우트했다.

그러나 성과는 쉽게 나오지 않고,적자는 쌓이면서 회의적인 시각도 팽배해졌다. 2001년과 2006년엔 그룹 차원에서 사업을 접자는 이야기가 불거져 나왔다. 구본무 LG 회장은 당시 "끈질기게 하다 보면 성공할 날이 올 거다. 여기에 우리의 미래가 있다"며 힘을 실어줬고,그의 예언은 빗나가지 않았다.

LG화학은 2007년 말 현대 · 기아자동차와 아반떼 하리브리드 및 포르테 하이브리드에 대한 공급계약을 맺으며 중대형 배터리 시장에서 큰 전환점을 맞았다. 이후 GM 시보레 볼트의 납품업체로 선정돼 승기를 잡은 뒤 한국의 CT&T와 중국 장안자동차,유럽 볼보와 르노,미국의 GM과 포드,이튼 등 모두 8곳의 글로벌 메이저 완성차 업체와 잇달아 계약을 터뜨리며 세계 최대 배터리 메이커로 자리매김했다.

◆탄탄한 포트폴리오가 강점

LG화학은 1947년 1월 구인회 LG 창업회장이 세운 화장품 제조업체인 락희화학공업사가 모체다. '동동구리무'로 불리던 럭키크림이 첫 제품이었다. 1950년대 들어선 비눗갑,장판 등을 만들며 국내에 플라스틱 시대를 열었다. 당시 이재형 상공부 장관이 국무회의에서 락희가 만든 '오리엔탈 빗'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내보이며 "이것이 국산입니다"라고 보고하자 이 대통령이 "우리도 이런 것을 만들 수 있나?"라며 반색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70년대 럭키로 이름을 바꾼 이후엔 플라스틱 원료를 생산하는 석유화학산업에 진출하면서 수직 계열화를 이뤘다. 1976년엔 여천공장을 완공하고 폴리염화비닐(PVC)과 ABS 수지 등을 생산하며 세계적인 석유화학업체로 성장하기 위한 토대를 닦았다.

1986년 사우디아라비아에 합작공장을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말레이시아,태국,인도네시아 등으로 사업장을 확장해 나갔다. 1994년부터는 제2의 내수시장으로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중국시장에도 진출했다. 1995년 LG화학으로 상호를 변경한 뒤 2000년대 들어 LG생활건강,LG생명과학,LG하우시스 등 소비재 사업을 분할하고 LG대산유화,LG석유화학 등을 합병하며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다양한 사업 포트폴리오를 무기로 60년이 넘는 오랜 시간 동안 단 한 번의 적자도 없이 흑자경영을 유지하고 있다.

◆바이엘과 신용등급 동급

"LG화학은 3만원에 사서 4만원에 팔면 되는 그저 그런 회사였다. "김반석 LG화학 부회장이 지난해 가을 기자 간담회에서 2000년대 초반 LG화학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가 2006년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비전 수립이었다.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모든 임직원들의 의견을 수렴해 나온 비전은 'To be a global leader(글로벌 리더가 되자)-차별화된 소재와 솔루션으로 고객과 함께 성장하는 세계적 기업'이었다.

그뒤 5년이 지난 지금,LG화학은 당시 비교 대상으로 꼽기조차 두려웠던 듀폰,바이엘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세계적인 화학기업으로 인정받고 있다. 화학산업 전문 조사기관인 ICIS는 지난해 9월 다우케미칼,바스프 등을 제치고 LG화학을 '올해의 화학기업'으로 선정했다. 국제신용평가회사인 무디스로부터 A3 신용등급을 획득한 데 이어 S&P에서도 같은 수준인 A- 등급을 획득했다. 국내 화학 · 정유기업 중 최고 수준으로 독일 바이엘과 같은 등급이다.

지난해 매출은 19조원,영업이익은 2조8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매출 규모에서 전세계 화학기업 가운데 6위로 성장했고,영업이익에선 이미 일본 기업들을 제치고 아시아 최고 기업의 자리에 올랐다. 중국 인도 미국 독일 등 전 세계 15개국에 28개의 생산 및 판매법인이 있을 정도로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LCD(액정표시장치)용 유리기판 등 성장 동력 갖춰

LG화학은 6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변신을 거듭하며 석유화학부문과 정보전자소재,2차전지 등 다양한 사업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2009년 기준 ABS와 편광판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각각 18.3%와 30%로 세계 1위다. 세계 시장을 이끌고 있는 자동차용 중 · 대형 배터리뿐 아니라 소형 2차전지에서도 14%로 3위를 차지하고 있다. 편광판 등 정보전자소재 분야에 진출할 당시 화학업체가 무모한 도전을 한다는 시각도 있었지만,국내 최초로 TFT-LCD용 편광판을 개발하는 등 뛰어난 기술력을 선보이며 그 같은 우려를 잠재웠다. 정보전자소재부문 매출은 2002년 4000억원을 돌파한 이후 2004년 1조3000억원,2008년 2조7000억원,2009년 4조2000억원으로 급성장했다.

편광판,2차전지와 함께 LCD용 유리기판도 LG화학이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삼고 있는 사업 아이템이다. LG화학은 내년 초 LCD 유리기판 라인 완공과 함께 상업생산에 나설 계획이다. 2018년까지 3조원을 투자해 생산라인을 지속적으로 확충할 계획이다. 김 부회장은 "2차전지와 편광판,유리기판 등 정보 · 전자 소재부문을 크게 확대해 세계 최고수준의 화학기업을 지향하고 있다"고 비전을 제시했다.

조재희 기자 joyja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