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 있는 리켐은 화학업체다. 2차전지 원료를 만든다. 리튬이온전지용 전해액 원료 30여가지를 취급한다. 이 회사의 대표를 만나본 사람은 명함을 정리할 때 깜짝 놀란다. 분명히 명함을 받았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사장 명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 회사 대표이사는 이남석 사장(42).하지만 그의 명함엔 '영업부장'으로 돼 있다. "사장 명함을 갖고 다니기에는 아직 너무 젊다"는 생각 때문이다. 리켐은 2009년 매출이 313억원에 달할 정도로 중소기업 중에선 규모도 제법 갖춘 업체지만 자기 자신을 철저히 낮추는 것이다.

중소기업인 중에는 이같이 대표이사가 명함에 다른 직함을 새기고 다니는 사례가 종종 있다. 반디라이트펜으로 유명한 길라씨엔아이의 김동환 대표(53)의 직함은 '책임사원 발명가'다. 기업경영에서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발명이 중요하다고 판단해서다. 그는 삼선교에서 야채를 배달한 것을 비롯해 아현동 달걀장사,인천 연안부두 떡장사,영업용 택시기사 등 많은 직업을 전전했다. 그러다 교통경찰이 밤중에 필기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펜끝에 불이 들어와 컴컴한 밤중에도 필기할 수 있는 '반디라이트펜'을 개발해 히트를 쳤고 최근엔 중소기업진흥공단의 지원을 받아 파리를 잡는 '파죽기'를 개발했다.

구자관 삼구개발 대표(67)의 직함은 '책임대표사원'이다. 사무실 명패나 호칭 역시 마찬가지다. 일반 사원과 똑같은 사원이면서도 사원으로서의 권한은 없고 '무한 책임'을 지는 대표라는 뜻이다. 서울 신대방동에 있는 삼구개발은 청소,건물 관리,호텔 방 정리,경비 등을 하는 업체로 구 대표는 자사 직원인 미화원들에게 90도로 깍듯이 인사하며 '여사님'이라고 부른다.

한편 남동공단에서 연구 · 개발형 바이오기업인 바이오에프디엔씨를 경영하고 있는 모상현 대표(36)의 명함에는 대표이사라고 씌어 있다. 하지만 영어는 CEO 대신 '스토리 크리에이터(Story Creator)'라고 적혀 있다. 그는 "기업인이란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김낙훈 중기전문기자 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