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유니레버사의 인도 현지 자회사인 HLL은 50년 이상 다국적 기업 제품을 살 수 있을 정도의 소수 고소득자를 대상으로 사업을 벌였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 니르마라는 인도 기업이 빈곤층 소비자를 대상으로 세제를 팔고 있다는 걸 알았다. 니르마사는 대부분 농촌 빈곤층을 대상으로 이들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제품과 가격,유통 네트워크 확대 등으로 급성장을 거듭했다.

HLL은 니르마사의 이 같은 전략을 무시했으나 결국 1995년 빈곤층 소비자를 겨냥한 신제품 세제 휠(Wheel)을 출시했다. HLL은 빈곤층 사람들이 강가나 마을 공동세탁장에서 주로 빨래를 한다는 사실에 착안,세제에서 오일이 차지하는 비율을 크게 낮췄다. 원재료는 대부분 지역사회 공급업자들로부터 조달했고,생산 · 마케팅 · 유통 모두 인도 농촌의 방대한 유휴 노동력을 이용해 기능을 분산시켰다. 빈곤층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수많은 구멍가게를 통해 제품을 팔고,비용구조를 개선해 가격도 낮췄다. 그 결과 지금은 HLL의 총 매출 가운데 절반을 이들 빈곤층 시장에서 올리고 있다.

《새로운 자본주의가 온다》는 이 같은 사례를 들며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는 고소득층이 아니라 그 바닥에 있는 저소득층과 빈곤층을 새로운 시장으로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저자인 스튜어트 하트는 미국 코넬대 존슨경영대 석좌교수.글로벌 기업들이 어떻게 하면 발전과 지속성을 함께 담보할 수 있는지 연구해온 전문가다.

그는 전 세계 대기업,특히 다국적 기업들이 이윤 창출과 사회적 기여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는 방법은 경제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는 부유층에 중점을 두는 낡은 자본주의에서 벗어나 '피라미드의 저변(BoP · Bottom of Pyramid)'을 대상으로 시장을 개척하고 공존의 지혜를 발휘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세계 인구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40억명이 '피라미드 저변' 시장이므로 수면 위에 드러난 빙산의 '일각'만 보지 말고 물밑의 거대한 본체를 공략하고 함께 하라는 것.그래야 세계 빈곤층의 삶의 질을 높이고 커뮤니티를 발전시키는 동시에 장래 후손들을 위해 지구의 생태계 보전에도 기여해 지속 가능한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얘기다.

21세기를 전후한 글로벌 경제위기는 지난 수십년 동안 구축된 세계 경제 체제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2008년 세계를 강타한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자본주의 재창조가 필요한 이유를 분석하면서 향후 전망과 대안을 모색한다. 최근 쏟아지는 비슷한 류의 책들과 다른 점은 지속 가능한 성장에 초점을 맞춰 경제는 물론 환경,빈곤 등 인류가 직면한 각종 문제를 아우르는 해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는 "글로벌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지금 갈림길에 서 있다"며 환경,빈곤 문제,테러리즘,금융 불안정에 이르기까지 당면한 도전 과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20세기 초반에 겪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끔찍한 재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래서 책의 원제는 '교차로에 선 자본주의(Capitalism at the Crossroads)'다.

저자가 제안하는 대안은 기업들이 사회적 의무라고 여겼던 것을 새로운 비즈니스의 기회로 삼으라는 것.예컨대 환경과 관련해 기업들은 의무감에서 비롯한 '그린'의 개념을 넘어서는 전략을 찾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지난 10년 사이에 청정기술 전략과 '피라미드 저변'을 겨냥한 전략은 폭발적인 관심을 끌어왔고 사회적 기업은 혁신의 선구자로 각광받아 왔다. 하지만 환경에 대한 영향을 줄이는 첨단기술을 개발해야 하는 청정기술 전략과 새로운 자본주의 창출 과정에서 모든 인류를 포용해야 하는 BoP전략은 각기 문제점과 맹점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따라서 두 전략을 통합해야 '그린 대도약'이 가능하며 청정기술을 사업화할 때 맨 먼저 관심을 둬야 할 시장이 바로 '피라미드 저변'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그래야 지속적 기업(sustainable enterprise)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가 주목하는 대상은 6만개가 넘는 다국적 기업이다. 25만개에 달하는 방계기업을 거느리고 세계 각국 국내총생산(GDP)의 25%를 주무르면서도 고용 총수는 전 세계 노동력의 1%에 불과하고 사리사욕만 추구한다는 비판을 받아왔지만 자본과 인력 등 이들의 방대한 자원 동원 능력과 기술개발 역량,글로벌 네트워크 등을 감안하면 대기업들이야말로 새로운 자본주의 창출의 주역이라는 얘기다. 또한 '피라미드 저변' 전략으로 성공한 수많은 사례를 소개하면서 벤치마킹할 수 있는 매뉴얼 내지 행동 프로그램까지 제시하고 있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