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와 일본 전자업체들이 제조업과 외주 생산을 놓고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일본 도시바가 경쟁자인 삼성전자에 비메모리 반도체 생산을 맡긴 것을 계기로 이런 관측에 설득력이 실리고 있다.

일본 업체들은 엔고 등에 따른 비용 부담을 이기지 못해 공장을 매각하고 적극적인 외주 생산에 나섰다. 반면 삼성전자는 '제조업이 핵심 경쟁력'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평택에 또다른 공장을 짓기로 했다.

한국과 일본업체들이 지난 10년간 벌여온 속도와 크기 경쟁을 넘어 또다른 경영 표준을 둘러싼 전쟁을 시작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TV,반도체 탈 일본 러시

일본 소니는 올해 인도 등 일부 지역 TV시장에서 삼성과 LG를 제치고 1위를 탈환했다. 그 비결은 외주생산에 있었다. 중국 등에서 외주생산을 통해 가격을 낮춤으로써 신흥국 시장에서 적극적인 공세를 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니는 외주생산 확대를 위해 멕시코 등지의 공장을 대만 홍하이 등에 매각하면서 공장을 9개에서 4개로 줄였다. 외주생산 비율도 59%까지 올라갔다.

도시바도 마찬가지다. 도시바의 TV부문 외주비율은 이미 60%까지 올라간 것으로 알려졌다. 파나소닉도 최근 이 대열에 합류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파나소닉은 내년부터 인도시장에서 TV생산 일부를 현지 업체에 맡기기로 했다.

반도체 업체들도 적극적인 해외 위탁 생산에 나섰다. 그동안 일본 반도체 업체들은 첨단기술의 해외유출을 꺼려 반도체 해외 생산에 머뭇거려왔다. 이 같은 움직임은 '반도체 라인에 거액을 투자해 직접 생산하는 수직통합 모델과의 결별'로 표현되고 있다.

후지쓰반도체의 야기 하루요시 부사장은 일본 언론에 "우리는 팹 라이트(fab light)화를 결단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다.

도시바는 삼성전자에 시스템LSI 생산을 위탁키로 했다. 후지쓰도 28나노 이후의 첨단 공정 전체를 대만의 세계 최대 수탁생산 기업인 TSMC 등 글로벌 생산전문회사(파운드리)에 맡길 방침이다. 후지쓰는 단순 생산위탁뿐 아니라 연구개발도 TSMC와 함께 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 반도체 업체들의 외주 생산은 경쟁력 상실의 결과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글로벌 시장에서 입지가 좁아짐에 따라 생산량이 줄어들고 이에 따라 원가가 높아져 공장 자체의 경쟁력을 상실하게 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일본 내에서는 외주생산 확대가 경쟁력 강화를 위한 필연적 과정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향후 소프트웨어는 물론 하드웨어의 경쟁력 자체도 상실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삼성,제조업 경쟁력이 산업의 원천

삼성이 다른 제조업체와 달리 외주생산을 하지 않는 1차적 이유는 경쟁력이 높기 때문이다. 원자재 구매시 높은 협상력으로 단가를 낮출 수 있고 대량 생산에 따른 공장 효율성이 높아졌다.

제조경쟁력을 높여야 산업의 주도권을 갖는다는 삼성의 철학도 반영돼 있다. 삼성 관계자는 "제조는 그 자체로 단순 제조에서 그치지 않고 연구개발,공급망 관리,마케팅 등을 동반하게 돼 있다"며 "이 과정에서 다양한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아이디어들이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최지성 삼성전자 부회장이 "제조업은 삼성이 갖고 있는 최고의 경쟁력"이라고 말한 것도 이와 유사하다. 제품에 부가적인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아이디어도 제조를 갖고 있을 때 더 많이 나올 수 있다는 얘기다. 삼성전자가 D램 반도체 1위를 한 후에도 파운드리 사업을 지속적으로 키워온 이유이기도 하다.

전자업계는 공장 하나 없이 세계 스마트폰 시장을 장악한 애플과 외주생산으로 전자왕국의 명예를 되찾으려는 일본업체들에 맞서 '제조의 삼성'이 벌이고 있는 승부에 주목하고 있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

◆ 시스템LSI

D램, 플래시 메모리 등을 제외한 비메모리 반도체를 말한다. 메모리가 데이터를 단순 저장하는 역할만 하는 반면 LSI는 TV 휴대폰 냉장고 자동차 등의 작동에 필요한 데이터 연산 기능을 한다. 휴대폰의 CPU(중앙처리장치) 역할을 하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를 비롯 디지털 카메라에 사용하는 이미지센서, TV의 디스플레이 구동칩,통신에 필요한 무선 구동칩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