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제가 큰 회사를 맡게 됐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 P:"새롭게 회사를 시작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그래도 그 많은 사업을 다 하시겠습니까. " J:"아마 많은 사업들은 하지 않겠지요. " P:"그게 답입니다. "

1981년 제너럴일렉트릭(GE)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잭 웰치가 경영학의 '구루' 피터 드러커와 나눈 대화 내용이다. 세계 1,2위를 하지 못할 사업부는 "고쳐라,매각하라,안 되면 폐쇄하라"는 그의 경영철학은 이 대화에서 나왔다. 웰치는 잘 알려진 대로 1982년부터 1995년까지 232개 사업부를 팔아 치웠다. 그는 이 같은 '버림의 미학'과 '스피드 경영'으로 어려움에 처한 GE를 다시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끌어올렸다. 국내에도 스피드와 과감한 버림의 철학을 실천한 사례들이 있다.


◆나에게 걸레는 남에게도 걸레

2008년 10월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야기된 미국발 금융위기 한파가 국내에도 들이닥쳤다. 일부 기업들이 어려움에 처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두산도 그 중 하나였다. 당시 수조원에 달하는 미국 기계회사 밥캣 인수비용으로 유동성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기자는 서울 동대문 두타 건물 33층에 있는 박용만 ㈜두산 회장실을 찾았다. 박 회장은 피곤한 모습이었지만 자신 있는 표정으로 답변을 이어갔다. 마지막 질문은 "소주 '처음처럼'을 매각할 계획이 있느냐"였다. 박 회장은 "돈벌어 주는 소주를 비용까지 줘가면서 왜 파나. 폴로도 마찬가지로 팔 계획이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박 회장의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두산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였다. 두산은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처음처럼' 매각 추진 사실을 공식화했다. 원매자가 뚜렷한 '처음처럼'부터 매각에 나섰다. 이후 두산테크팩,삼화왕관,두산인프라코어 방산부문,STX 지분 등 핵심역량과 관계없으면서 돈 될 만한 것들은 다 팔아 치웠다. 지난 7월에는 폴로사업권까지 매각했다.

1990년대 말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당시에도 OB맥주 등 돈 되는 것들을 다 팔아버리며 권토중래를 꿈꿨다.

이런 두산의 위기경영 철학을 보여주는 말이 있다. 박용성 당시 회장은 외환위기에서 벗어난 후 한 강연에서 구조조정에 대해 "나에게 걸레는 남에게도 걸레"라고 말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회사들은 가치 없는 것부터 팔려고 하지만 두산은 반대였다는 얘기다.

◆내년의 110원보다 지금 100원이 중요

기업 인수에 적극적인 회사들이 경영 환경이 급속히 변하면 유동성 위기를 겪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를 승자의 저주라 부른다. 대한전선도 마찬가지였다. 해외기업,국내 건설사 등을 잇따라 인수했지만 금융위기가 몰려오자 유동성 문제에 봉착했다.

SK 출신의 손관호 회장이 경영을 맡으면서 대한전선은 본격적인 구조조정에 나섰다. 지난 8월 대한전선의 한 회의실에서는 몽골 이동통신사 지분 매각을 놓고 격론이 붙었다. 일부 임원들은 "성장성이 높은 회사인데 좀 기다려서 팔면 충분히 제값을 받고 매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손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내후년에 들어올 110원보다는 지금 내 손에 쥐고 있는 100원이 훨씬 중요하다"며 매각을 결정했다.

최근 2년간 대한전선은 오직 매각에만 매달렸다. 2009년에는 한국렌탈,대한ST,트라이브랜즈,노벨리스코리아 지분을 팔았고 올해도 프리즈미안 지분,TMC,캐나다 힐튼호텔,스카이텔,온세텔레콤 등을 잇따라 매각했다. 올해만 유상증자와 계열사 매각을 통해 확보한 자금이 1조원을 웃돌았다. 그 결과 대한전선은 내년께 채권단 관리(재무구조개선 약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과거 삼성도 마찬가지였다. IMF 체제에 들어간 지 1개월 남짓 지난 1997년 12월 어느 날.이건희 회장은 세계적 투자은행인 미국 골드만삭스 존 코자인 회장 일행과 면담을 가졌다. 삼성이 내놓은 구조조정안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이 오갔지만 답이 잘 나오지 않았다.

긴 침묵 후 이 회장이 결론을 내렸다.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을 제외하고 그 어떤 회사를 처분해도 좋습니다. " 핵심 계열사 외에 어떤 계열사건 팔겠다는 것이었다. 코자인 회장은 놀라며 "어디까지 골드만삭스가 해야 할 일입니까"라고 물었다. 이 회장은 "팔 회사의 값을 매겨 처분하는 것까지 모든 것을 위임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모든 계열사가 구조개혁의 대상이 되는 순간이었다. 삼성에서는 이를 '버림의 경영'이라 부른다. 이 회장이 사재로 인수해 반도체 사업의 꿈을 꾸기 시작했던 부천 반도체 공장도 당시에 매각됐다. 버림을 기반으로 삼성은 2000년대 글로벌 일류기업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