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과학기술위원회를 상설 정부기구로 만들어 공공 연구 · 개발(R&D) 예산 14조여원의 배분 · 조정권을 부여키로 하는 정부의 과학기술 거버넌스 개편안이 최근 나왔다. 과학기술계의 염원을 담은 이 안은 윤종용 한국공학한림원 회장(66 · 삼성전자 상임고문)의 추진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는 평가다. 작년 말 '과학기술 출연연구원 발전 민간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윤 회장은 그간 각계 인사 수백명을 만나 다양한 의견을 수렴했다. 그 결과물이 7월 말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고한 '국민소득 4만달러 시대를 향한 새로운 과학기술 시스템 구축과 출연연구원 발전방안 보고서'다.

보고서의 골자는 이번 정부 안에 그대로 반영됐다. '삼성 샐러리맨의 신화'로 잘 알려진 윤 회장은 "삼성 최고경영자(CEO) 시절보다 더 열심히 했다"고 말할 정도로 이번 프로젝트에 심혈을 기울였다. 국과위의 장관급 부위원장으로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는 그를 서울 중구 태평로빌딩 내 사무실에서 만났다.

▼정부의 과학기술 거버넌스 개편안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민간위가 제시한 것 이상으로 강력한 내용을 담았습니다. 인류는 도구의 발달과 과학기술의 혁신에 의해 발전해왔습니다. 이것은 논쟁이 필요 없는 진리입니다. 인터넷과 휴대폰만 봐도 우리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세상을 만들었잖아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거버넌스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휘둘려 왔습니다. 정치적 이해관계,부처 이기주의,공무원 개인의 이기주의 탓이죠.이걸 전부 배제하고 최선의 안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

▼현 시스템에 문제가 많습니까.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 R&D 예산은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상위권인데 성과는 의문입니다. 민간은 책임을 지는데 공공분야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R&D의 큰 축은 민간과 대학,출연연구원인데 기업의 응용연구와 대학의 기초연구는 이제 상당한 수준에 올랐습니다. 출연연구원은 과거 산업 발전을 견인했지만,현재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역할이 모호해졌죠.그래서 우리는 출연연구원의 포지셔닝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우주나 해양 등 거대과학,융 · 복합 기술기반 녹색산업,사회안전망 구축 등 공공인프라 기술 등을 담당하는 게 맞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출연연구원 통폐합 안을 내놓은 것입니다. 지금은 지식경제부 교육과학기술부 국토해양부 등으로 갈려 있어 교류도 안되고 융 · 복합 기술 발굴도 힘듭니다. 칸막이가 너무 높은 탓이죠."

▼큰 그림은 잘 짰는데 출연연구원 문제가 아직 미제로 남았습니다.

"출연연구원의 제도를 확 바꿔야 합니다. 연구원 정년과 기관장 임기를 늘리는 한편 능력 있는 사람은 테뉴어(tenure · 종신근무 권리)를 줘야 합니다. 기관장은 공모가 아니라 능력 있는 사람을 삼고초려해서 데려와야 한다고 봅니다. 평가시스템도 획일적 평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중 · 장기 연구 계획과 그에 걸맞은 성과로 평가해야 할 텐데 단기적 평가에 너무 치우쳐 있습니다. SCI(과학기술논문 인용색인) 논문 게재 건수에 너무 매달리는 것도 문제죠.공대 교수들이 이런 평가 때문에 석 · 박사과정에만 매달려 학사과정이 엉망이 된다고 합니다. "

▼일부 출연연구원은 통폐합이 적절치 않다는 의견이 있는데.

"연구원 개편에 부처 이기주의가 개입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권력 지향적이 돼서도 안 됩니다. 출연연구원은 국민의 것이며,운영은 국민 세금으로 합니다. 출연연구원 브랜드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국가 발전에 필요하다면 큰 그림을 따라가야 합니다. "

▼출연연구원 구조 개편 논의를 다음 정권에서 하자는 얘기가 야당에서 흘러나옵니다.

"여당이건 야당이건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크게 생각해야 합니다. 국가의 명운을 가를 수 있는 거대한 주제를 정치적으로 접근해서는 정말 곤란합니다. 이번에 제대로 하지 않으면 영영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

▼융 · 복합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는데,향후 선도적 융 · 복합 기술의 촉매는 뭐가 있을까요. 최근 바이오기술(BT)이 정보기술(IT)을 앞질렀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생체의학 파인케미컬(제약 등 정밀화학) 바이오인포매틱스 등 바이오 기술은 따로 가는 게 아닙니다. 서로 연결돼서 발전하며,IT와 접목해야 합니다. 자동차만 봐도 이제 운송수단이라기보다는 IT 기반 컴퓨터나 다름없습니다. 나노테크놀로지도 IT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경향은 앞으로 더욱 두드러질 것입니다. "

▼과학기술 분야에서 한국인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못하는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과학자들이나 교수들은 상당히 우수합니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도 한국인 과학기술자들이 실력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연속성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일본이 과학분야 노벨상을 타는 이유는 한 분야에 오랫동안 공을 들이는 기질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 사회는 연구자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교수들 가운데 권력지향적인 사람이 꽤 많다고 봅니다. 정부에서 교수를 너무 많이 쓰기도 하고요. 그러다보니 전문가 지향적 기질은 줄어들고,권력 지향적 기질이 생기는 겁니다. "

▼과학기술 육성 못지않게 저출산으로 인한 생산활동 인구 감소문제가 심각합니다. 이에 대한 해법으로 '200만 이민을 받아들이자'는 제안을 내놓아 주목을 받으셨는데.

"인구 감소는 국가적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체계적인 외국인 활용정책을 세워야 합니다. 예컨대 베트남이나 중국 등 한자문화권에서 고교 졸업 이상 학력의 남자 100만명과 여자 100만명을 받아들여 1~2년 정도 한국어를 가르치고,적응 훈련을 시켜서 정착하게 하면 인구 증가와 함께 양질의 노동력을 싸게 제공받을 수 있는 효과를 볼 것입니다. 이런 정책을 제대로 시행하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이민청'을 만들어 체계적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작은 정부' 원칙을 지키기 위해 부처 신설이 곤란하다는 얘기가 있습니다만,쓸데없는 부처를 없애면 되지 않겠습니까. "

▼공학한림원에 농산업경쟁력위원회와 전통산업지속발전위원회를 만드셨는데,배경이 궁금합니다.

"최근 신재생에너지가 공학기술의 화두지만,그보다 더 중요한 게 물과 식량입니다. 식수는 바닷물을 담수화하는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식량 수요 증가 문제는 해결이 안 됩니다. 중국 인도 아프리카 등 신흥 공업개발국이 늘어나면 수요 증가 속도가 더 빨라질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농업은 철저하게 산업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농가소득을 보전해주는 방법은 곤란합니다. 우루과이라운드 타결 이후 농가소득 보전에 들어간 돈이 100조원이 넘는데,그 돈이 다 어디로 갔습니까. 농업과 농촌,농민을 분리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농지를 사고파는 문제도 전향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필요한 기업이 농지를 사서 농업을 산업화할 공간을 마련해 줘야 합니다. 현재 유수 다국적 기업이 종자산업에 뛰어들 정도로 농업에 대한 경쟁은 물밑에서 치열합니다. IBM도 종자사업에 뛰어들었을 정도입니다. "

▼전통산업은 어떻게 해야 강해집니까.

"IT 녹색산업 등 첨단만 좋은 게 아닙니다. 섬유 신발 등 전통산업도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습니다. 세계적 명품 기업은 글로벌 수준에서 보면 다 중소기업입니다. 이 분야는 R&D 비용도 그렇게 많이 들지 않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데,그냥 공감만 하고 끝나는 경우가 많은 게 문제입니다. "

▼앞으로 기초기술과 응용기술 가운데 어디에 더 투자를 해야 합니까.

"양쪽 다 균형을 맞춰 추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응용연구는 기업에서 알아서 하니 대학과 출연연구원은 기초기술에 집중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도 과학기술 R&D 체계를 이번에 꼭 정리해야 합니다. 다만 중소기업은 자력 R&D가 안 되기 때문에 정부가 상당 기간 도와줘야 합니다. 한국의 미래 경쟁력을 비관할 이유는 없습니다. 40년 전만 해도 오늘의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는 꿈도 못 꾸지 않았습니까. 긴장은 해야겠지만 사회 각 분야가 뛰고 정부가 적극 지원한다면 세계 시장에서 충분히 앞설 수 있습니다. "

대담=이학영 편집국 부국장
정리=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