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길진 칼럼] 세상에는 두 가지 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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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매 초당 약 460m로 돌고 있다. 시속 300Km로 달리는 KTX고속열차보다 보다 무려 5배가 넘는 빠른 무서운 속도다. 그러나 지구 안에 사는 우리는 이를 인식하지 못한다. 대기권 밖으로 나가야만 그 사실을 실감하는 것이다. 그러면 대기권 밖에서 본 것이 옳을까, 지구 안에서 본 것이 옳을까.
옳고 그름은 법(法)으로 판단한다지만, 법으로도 판단할 수 없는 세상사는 무엇으로 판단해야 하나. 우리는 이런 법을 보통 관습법, 또는 인정법이라 하여 법 이상으로 대할 때가 있다. 세상 진리를 말할 때 어찌 사람이 만든 법으로 모든 것을 다 판단할 수 있겠는가.
법에는 정법(正法)과 같이 이치상, 논리상 분명하게 맞는 법이 있는 반면, 정법 밖의 또 다른 법으로 보이지 않는 법인 방편법(方便法)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법과 윤리는 정법이고, 법을 초월하는 진리는 방편법인 것이다. 어느 법을 따라야 하느냐의 문제는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기에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정법에 따라 살지만 하늘이 몰라주는 사람이 있고, 언뜻 보기엔 옳지 않아 보이는 방편법을 따르지만 세상의 온갖 복을 누리는 사람도 있다. 보이는 것 이상의 깨달음, 즉 방편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능력 있고 재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정도(正道)를 걷는 사람은 답답하고 융통성 없는 사람으로 오해를 받는 경우가 있다. 어찌보면 불공평해 보일지 몰라도 세상은 그렇게도 굴러가는 것이다.
길을 가다보면 간혹 거리에서 불전함을 놓고 시주를 구하는 스님을 만날 수 있다. 어느 날 가던 길을 멈추고 불전함에 시주를 하였다. 그랬더니 같이 가던 분이 필자에게 말했다. “저 사람은 진짜 스님이 아닐 겁니다. 시주하신 그 돈은 아마 다른 곳에 사용할 겁니다.” 그 분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아마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분이 모르는 것이 있다. 내가 시주하는 것은 그 사람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 돈을 어디에 사용하든 그것은 나와는 상관이 없다. 그리고 지인의 말처럼 돈을 만약 다른 곳에 사용한다면 그는 그에 따른 업(業)을 쌓게 될 것이다.
보이는 것만 보려하면 다른 것은 보지 못한다. 다른 것을 보지 못하면 전체를 다 안다고 할 수 없다. 겉만 보지 말고, 겉과 속 모두를 보아야 한다. 세상을 제대로 보려면 우주에서 지구를 보듯이 한 걸음 떨어져서 볼 필요가 있다. 솔직한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듯이, 살아가는 데는 정법만이 옳은 것은 아니다. 정법만을 추구하다 보면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우를 범한다. 방편법과 정법을 적절히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만약 하늘아래 유일한 정법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일 것이다. 문자에 갇힌 법이 진정한 법이 아니듯이, 문자에 갇힌 진리(眞理) 역시 진정한 진리라고 할 수 없다. 문자는 관념이요, 허상이며, 진리를 이해시키는 수단일 뿐이다. 허상에 얽매이지 말고 실상을 바라보는 것이 지혜로운 자의 모습이다. 깨달은 자의 허튼 소리는 정법이요, 위선자의 고매한 연설은 사법(邪法)인 것이다. 옳고 그름은 큰 차이가 아니라, 한 생각의 차이인 것이다.
한 잔의 물을 엎지르면 우주 전체가 목마르고, 한 송이 꽃을 꺾으면 우주의 일부분이 꺾이는 것이다. 쌀쌀한 날씨에도 꽃망울을 터뜨리는 꽃을 바라보며 사람이 만든 수많은 분별(分別)을 바람에 훌훌 날려 보내라. (hooam.com/whoi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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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고 그름은 법(法)으로 판단한다지만, 법으로도 판단할 수 없는 세상사는 무엇으로 판단해야 하나. 우리는 이런 법을 보통 관습법, 또는 인정법이라 하여 법 이상으로 대할 때가 있다. 세상 진리를 말할 때 어찌 사람이 만든 법으로 모든 것을 다 판단할 수 있겠는가.
법에는 정법(正法)과 같이 이치상, 논리상 분명하게 맞는 법이 있는 반면, 정법 밖의 또 다른 법으로 보이지 않는 법인 방편법(方便法)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법과 윤리는 정법이고, 법을 초월하는 진리는 방편법인 것이다. 어느 법을 따라야 하느냐의 문제는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기에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정법에 따라 살지만 하늘이 몰라주는 사람이 있고, 언뜻 보기엔 옳지 않아 보이는 방편법을 따르지만 세상의 온갖 복을 누리는 사람도 있다. 보이는 것 이상의 깨달음, 즉 방편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능력 있고 재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정도(正道)를 걷는 사람은 답답하고 융통성 없는 사람으로 오해를 받는 경우가 있다. 어찌보면 불공평해 보일지 몰라도 세상은 그렇게도 굴러가는 것이다.
길을 가다보면 간혹 거리에서 불전함을 놓고 시주를 구하는 스님을 만날 수 있다. 어느 날 가던 길을 멈추고 불전함에 시주를 하였다. 그랬더니 같이 가던 분이 필자에게 말했다. “저 사람은 진짜 스님이 아닐 겁니다. 시주하신 그 돈은 아마 다른 곳에 사용할 겁니다.” 그 분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아마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분이 모르는 것이 있다. 내가 시주하는 것은 그 사람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 돈을 어디에 사용하든 그것은 나와는 상관이 없다. 그리고 지인의 말처럼 돈을 만약 다른 곳에 사용한다면 그는 그에 따른 업(業)을 쌓게 될 것이다.
보이는 것만 보려하면 다른 것은 보지 못한다. 다른 것을 보지 못하면 전체를 다 안다고 할 수 없다. 겉만 보지 말고, 겉과 속 모두를 보아야 한다. 세상을 제대로 보려면 우주에서 지구를 보듯이 한 걸음 떨어져서 볼 필요가 있다. 솔직한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듯이, 살아가는 데는 정법만이 옳은 것은 아니다. 정법만을 추구하다 보면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우를 범한다. 방편법과 정법을 적절히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만약 하늘아래 유일한 정법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일 것이다. 문자에 갇힌 법이 진정한 법이 아니듯이, 문자에 갇힌 진리(眞理) 역시 진정한 진리라고 할 수 없다. 문자는 관념이요, 허상이며, 진리를 이해시키는 수단일 뿐이다. 허상에 얽매이지 말고 실상을 바라보는 것이 지혜로운 자의 모습이다. 깨달은 자의 허튼 소리는 정법이요, 위선자의 고매한 연설은 사법(邪法)인 것이다. 옳고 그름은 큰 차이가 아니라, 한 생각의 차이인 것이다.
한 잔의 물을 엎지르면 우주 전체가 목마르고, 한 송이 꽃을 꺾으면 우주의 일부분이 꺾이는 것이다. 쌀쌀한 날씨에도 꽃망울을 터뜨리는 꽃을 바라보며 사람이 만든 수많은 분별(分別)을 바람에 훌훌 날려 보내라. (hooam.com/whoi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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