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사는 내내 도피처요 해방구였다. 어린 시절 고무줄이나 공기 같은 놀이를 못해 또래에게 왕따당하면서도 외롭거나 슬프지 않았던 건 순전히 책 덕분이었다. 깍두기로 붙여줘도 금세 죽는 통에 좀처럼 끼워주지 않는 아이들 옆에서 우두커니 구경만 하느니 혼자 책을 읽었다.

내용은 상관없었다. 뭐든 새롭고 신기했기 때문이다. '시이튼 동물기' '파브르 곤충기' '비이글호 항해기'(찰스 다윈)는 흥미진진했고,'쿼바디스'(헨릭 센케비치) '보물섬'(로버트 스티븐슨) '장 발장'(레 미제라블,빅토르 위고)은 이야기의 즐거움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플루타르크영웅전과 나폴레옹전을 비롯한 위인전은 '그래,환경 따윈 아무 것도 아니야.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은 없을 거야'라고 다짐하게 했다. 나이 들어서도 다르지 않았다. 사는 게 징그러울 때 펴든 책에서 마음에 와닿는 내용이 발견되면 가슴이 환해지며 살아봐야지 싶었다.

수많은 책 가운데도 유독 곁에 가까이 두고 싶은 책이 있다. 언제든 꺼내 손때 묻은 페이지를 읽노라면 나도 모르게 미소짓게 되는 것들이다. 장르는 다양하다. 사람 얘기를 좋아하다 보니 자서전류가 많지만 시집과 소설도 있고 과학, 경영,마케팅,자기계발에 관한 것도 있다.

《일의 즐거움》(김영사,2004)은 2002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다나카 고이치의 자서전이다. 손에 든 순간 단숨에 끝까지 다 읽었을 뿐만 아니라 수시로 들춰보고 칼럼에도 종종 인용하는 만큼 언제든 손을 뻗어 꺼낼 수 있는 자리에 둔다. 책은 두껍지 않다. 과학자가 썼지만 어렵지 않고 무엇보다 자서전 특유의 과장이 없다.

다나카는 노벨상 역사상 최초의 학사 출신 회사원 수상자다. 인간 승리의 주인공임이 분명한데 정작 본인은 '엔지니어로서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게 즐거운 보통 사람일 뿐'이라고 말한다. 실제 그는 수상 후 임원 승진도 마다한 채 다니던 회사에 계속 근무하고 있다.

자서전 집필 이유를 '자신의 이야기가 그늘에서 묵묵히 일하는 이들의 의욕을 북돋울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과 '불필요한 오해나 비효율적인 설명을 줄이고 연구하는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라고 밝힌 그는 어렸을 때부터 노벨상을 받기까지의 과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단백질 질량 분석으로 화학상을 받았지만 전공은 전기공학이었다. 전기를 다루면 적어도 밥을 굶진 않겠지라는 현실적 발상에서 택했다. 따라서 사회에 진출했을 때 화학에 대해 갖고 있던 기초지식이라야 고등학생 수준에 불과했다. '

대학에 입학한 뒤 입양아라는 사실에 충격받아 낙제하고 가전업체 취업에도 실패,중견기업 연구소에서 일하던 자신이 노벨상 수상자가 된 요인으로 그는 뭐든 붙들고 늘어지는 '끈기'와 상식에 얽매이지 않고 대든 '도전정신',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는 '관찰력'과 기록하는 습관,짬짬이 영어논문을 발표한 것 등을 들었다.

책은 화려한 스펙도 든든한 배경도 없는, 그래서 풀 죽고 어깨 처진 이들에게 이른다. '겉에 드러난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중요한 건 간판보다 스스로를 믿고 꿈을 잃지 않으면서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다'라고. 또 하나,이 책은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쉽고 명쾌하게 답한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마음으로부터 즐기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게 그것이다.

박성희 수석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