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 다시 보기] (10) 맬서스는 산업혁명의 힘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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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맬서스적 세계와 근대적 성장
인구와 1인당 생산성 동시에 늘어나는 '대사건' 발생
"기하급수적 인구증가로 빈곤 초래" 이론 결국 오류로
인구와 1인당 생산성 동시에 늘어나는 '대사건' 발생
"기하급수적 인구증가로 빈곤 초래" 이론 결국 오류로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 꼴을 못 면한다. ' 1960년대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붙어 있던 산아 제한 표어다. 인구가 많아지면 가난해진다는 맬서스적 세계관의 산물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를 가장 먼저 한 사람은 토머스 맬서스가 아니라 조지프 타운센드라는 영국의 한 성직자였다. 그는 한 나라의 인구는 식량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만약 인구가 식량 생산 수준을 넘어서면 그때까지 누려온 안락함은 일시에 사라지고 고통과 굶주림이 덮칠 것이라고 예언했다. 맬서스가 그 유명한 《인구론》을 세상에 내놓은 것은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1798년이었다.
맬서스는 인간의 성적 욕망은 끝이 없어서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데 비해 식량은 산술급수적인 증가가 고작이므로 모든 사람이 빈곤해지는 운명을 피할 수 없으며 종국에는 질병,기아,전쟁 등의 '적극적 제동'에 의해 강제적으로 인구가 감소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고 했다. 이러한 파국을 면하기 위해서는 결혼을 미루거나 성적 충동을 억제해 출산율을 낮추는 '예방적 제동'이 필요하다고 했다.
인구 문제에 대한 비관적 견해는 19세기 전반 영국의 여론 주도층 사이에서 급속히 퍼졌으며 산아 제한은 시대의 화두가 됐다. 그러나 방법론에서 사람들의 의견은 갈라졌다. 하나의 입장은 섹스는 인간의 권리이며 억제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런 입장에 선 사람들은 섹스를 즐기되 질외 사정 등의 방법이나 스펀지 등을 피임 도구로 사용할 것을 권장했다.
다른 하나의 입장은 도덕적 절제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혼전 섹스는 물론 경제적 능력도 없이 조혼해 다산하는 '흥부형' 빈민들은 사회악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논쟁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제대로 된 피임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첫 번째 입장이 점차 입지를 상실하고 두 번째 입장이 대세를 차지한 것이다. 그러면서 도마에 오른 것이 빈민법이었다.
맬서스는 빈민법이 빈민들의 노동 의욕을 잃게 만들고 조혼과 다산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또 스스로의 노동이 아닌 복지에 의존해 살아가는 빈민들에게는 치욕을 주는 것이 자연의 법칙에 합당하다고 주장했다. 타운센드 또한 굶주림이야말로 인구 증가를 억제하는 최선의 방책이므로 빈민법을 폐지해야 한다고 했다.
16세기에 처음 만들어진 영국의 빈민법은 18세기 말에 이르러 소위 '스핀엄랜드'라는 제도로 진화했다. 가족의 숫자에 따라 최저 생계비를 산정하고 노동자의 소득이 거기에 미치지 못할 때 구빈세 재원에서 부족분을 보전해주는 제도였다.
1795년 버크셔에서 태어난 이 제도가 영국 전역으로 보급됨에 따라 구빈세 부담이 크게 늘어났다. 1760년에서 1784년 사이 구빈세 증가는 60%에 불과했으나 스핀엄랜드가 확산된 이후인 1801년의 구빈세 부담은 1760년 대비 3배로 늘어났고 1818년에는 무려 6배에 달했다. 타운센드나 맬서스가 인구 증가를 부추기는 주범으로 지목한 빈민법은 바로 이 스핀엄랜드 제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저명한 정치학자였던 알렉시 토크빌이 영국을 방문한 것은 1833년이었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의 결실을 본격적으로 거두기 시작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돼 있었다. 그런데 그런 나라의 국민 여섯 중 한 명이 복지에 기대어 살아가는 빈민이라는 사실이 토크빌에게는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좋은 옷에 멋진 가발까지 한 사람이 빈민수당 삭감에 항의하는 모습을 보았으며,남편에게 버림받은 임신부 며느리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거부하는 시아버지를 목도했으며,자신이 낳은 사생아의 아버지를 당당하게 밝히는 미혼모를 보았다.
그는 빈민법이 가져올 부작용을 경고하면서 맬서스의 빈민법 폐지론을 적극 옹호했다. 이듬해 새로운 빈민법을 제정하면서 스핀엄랜드 제도는 폐지됐다. 이제 빈민들을 맞아줄 곳은 차가운 수용소와 강도 높은 노동이었다.
그러나 맬서스와 그의 동료들은 역사의 맥을 잘못 짚고 있었다. 그들은 산업혁명이라는 대사건의 한 가운데에 서 있었으나 그것이 가져올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인구와 1인당 생산이 동시에 증가하는 근대적 경제성장의 세계가 열리고 있었다.
허구생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장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를 가장 먼저 한 사람은 토머스 맬서스가 아니라 조지프 타운센드라는 영국의 한 성직자였다. 그는 한 나라의 인구는 식량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만약 인구가 식량 생산 수준을 넘어서면 그때까지 누려온 안락함은 일시에 사라지고 고통과 굶주림이 덮칠 것이라고 예언했다. 맬서스가 그 유명한 《인구론》을 세상에 내놓은 것은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1798년이었다.
맬서스는 인간의 성적 욕망은 끝이 없어서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데 비해 식량은 산술급수적인 증가가 고작이므로 모든 사람이 빈곤해지는 운명을 피할 수 없으며 종국에는 질병,기아,전쟁 등의 '적극적 제동'에 의해 강제적으로 인구가 감소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고 했다. 이러한 파국을 면하기 위해서는 결혼을 미루거나 성적 충동을 억제해 출산율을 낮추는 '예방적 제동'이 필요하다고 했다.
인구 문제에 대한 비관적 견해는 19세기 전반 영국의 여론 주도층 사이에서 급속히 퍼졌으며 산아 제한은 시대의 화두가 됐다. 그러나 방법론에서 사람들의 의견은 갈라졌다. 하나의 입장은 섹스는 인간의 권리이며 억제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런 입장에 선 사람들은 섹스를 즐기되 질외 사정 등의 방법이나 스펀지 등을 피임 도구로 사용할 것을 권장했다.
다른 하나의 입장은 도덕적 절제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혼전 섹스는 물론 경제적 능력도 없이 조혼해 다산하는 '흥부형' 빈민들은 사회악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논쟁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제대로 된 피임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첫 번째 입장이 점차 입지를 상실하고 두 번째 입장이 대세를 차지한 것이다. 그러면서 도마에 오른 것이 빈민법이었다.
맬서스는 빈민법이 빈민들의 노동 의욕을 잃게 만들고 조혼과 다산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또 스스로의 노동이 아닌 복지에 의존해 살아가는 빈민들에게는 치욕을 주는 것이 자연의 법칙에 합당하다고 주장했다. 타운센드 또한 굶주림이야말로 인구 증가를 억제하는 최선의 방책이므로 빈민법을 폐지해야 한다고 했다.
16세기에 처음 만들어진 영국의 빈민법은 18세기 말에 이르러 소위 '스핀엄랜드'라는 제도로 진화했다. 가족의 숫자에 따라 최저 생계비를 산정하고 노동자의 소득이 거기에 미치지 못할 때 구빈세 재원에서 부족분을 보전해주는 제도였다.
1795년 버크셔에서 태어난 이 제도가 영국 전역으로 보급됨에 따라 구빈세 부담이 크게 늘어났다. 1760년에서 1784년 사이 구빈세 증가는 60%에 불과했으나 스핀엄랜드가 확산된 이후인 1801년의 구빈세 부담은 1760년 대비 3배로 늘어났고 1818년에는 무려 6배에 달했다. 타운센드나 맬서스가 인구 증가를 부추기는 주범으로 지목한 빈민법은 바로 이 스핀엄랜드 제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저명한 정치학자였던 알렉시 토크빌이 영국을 방문한 것은 1833년이었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의 결실을 본격적으로 거두기 시작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돼 있었다. 그런데 그런 나라의 국민 여섯 중 한 명이 복지에 기대어 살아가는 빈민이라는 사실이 토크빌에게는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좋은 옷에 멋진 가발까지 한 사람이 빈민수당 삭감에 항의하는 모습을 보았으며,남편에게 버림받은 임신부 며느리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거부하는 시아버지를 목도했으며,자신이 낳은 사생아의 아버지를 당당하게 밝히는 미혼모를 보았다.
그는 빈민법이 가져올 부작용을 경고하면서 맬서스의 빈민법 폐지론을 적극 옹호했다. 이듬해 새로운 빈민법을 제정하면서 스핀엄랜드 제도는 폐지됐다. 이제 빈민들을 맞아줄 곳은 차가운 수용소와 강도 높은 노동이었다.
그러나 맬서스와 그의 동료들은 역사의 맥을 잘못 짚고 있었다. 그들은 산업혁명이라는 대사건의 한 가운데에 서 있었으나 그것이 가져올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인구와 1인당 생산이 동시에 증가하는 근대적 경제성장의 세계가 열리고 있었다.
허구생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