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모가와(鴨川)에 봄꽃이 핀 1924년 어느 날.20대 초반의 젊은이가 낡은 가방을 들고 교토에 나타났다. 교토는 1000년 넘게 일본 수도였던 고도(古都).가난한 집안환경 때문에 휘문고보를 가까스로 나온 그 청년은 교비 장학생으로 선발돼 부푼 꿈을 안고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도시샤(同志社)대에 입학해 영문학을 공부한 그는 교토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시내 가모가와에 나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가모가와 십릿벌에 해는 저물어…'로 시작되는 '가모가와'라는 시도 남겼다. 가모가와는 오리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지금도 오리가 종종 눈에 띈다.

그로부터 19년 뒤인 1943년.또 한 명의 한국 청년이 이곳에 발을 내디딘다. 16세에 도일한 그 역시 사정이 어렵기는 마찬가지.리쓰메이칸(立命館)대학 법학부를 중퇴한 뒤 가모가와 근처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지금도 이 회사는 가모가와 옆에 본사를 두고 있다.

도시샤대를 나온 그 청년의 이름은 정지용.'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바로 '향수'의 시인이다. 그는 이곳에서 근대적인 시작법의 틀을 익힌 뒤 한글의 맛을 살린 시와 수필을 썼다. 풀과 나무가 우거지고 맑은 물이 흐르는 가모가와는 그의 고향 충북 옥천과 더불어 아름다운 시의 꽃을 피우는 자양분을 제공한 셈이다.

리쓰메이칸대를 중퇴한 청년은 유봉식 MK택시 회장이다. 그는 단순한 경영자에서 한걸음 나아가 일본 사회에 변혁의 불꽃을 튀긴 사람이다. 가난한 택시기사들에게 내집을 마련해주고,장애인을 우선 승차시키며,택시회사를 리츠칼튼 같은 최고급 서비스업체로 승화시켰다.

오죽하면 알랭 들롱,지미 카터,리콴유,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의전용 차량을 사양하고 MK택시를 탔을까.

세계적인 디자이너 모리 하나에가 디자인한 멋진 유니폼을 입혀 운전기사들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든 기업인.이 회사의 대졸 운전기사 채용경쟁률은 100 대 1이 넘기도 했다.

교토는 특이한 곳이다.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소설로 유명한 킨가쿠지(金閣寺)를 비롯해 긴가쿠지(銀閣寺) 기요미즈데라(淸水寺) 등 고색창연한 절뿐 아니라 교토고쇼(京都御所) 등 문화재와 유적이 즐비하다. 이런 문화의 토양 속에서 MK택시와 '아메바경영'의 교세라 호리바제작소 일본전산 옴론 닌텐도 등이 태어나 성장하고 있다.

일본의 산업구조가 대기업과 계열 중소기업들로 이뤄진 항공모함 편대라면 이곳엔 어느 계열에도 속하지 않은,쾌속정 같은 독립기업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은 비록 미쓰비시나 미쓰이 소니에 비해선 작지만 민첩하고 강하다.

최근 들어 경영난에 허덕이는 일본 기업들이 많다. 하지만 교토의 벤처기업들은 다르다. 이들은 불굴의 도전정신과 첨단기술을 무기로 글로벌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라 거친 비바람 속에서 피어난 야생화다.

한국에도 도전 정신과 열정이 식은 기업이 있다면 한번쯤 교토의 기업들을 찾아가 볼 필요가 있다. 저녁엔 벚나무로 우거진 가모가와 근처에서 차를 음미하면서 도전정신을 되찾고 일본을 뛰어넘겠다는 의지를 다진다면 뭔가 섬광처럼 스치는 게 있으리라 확신한다. 지난 6월 하순 이곳을 찾은 국내 중견 · 중소기업 대표와 임원들이 경험한 것처럼.

김낙훈 중기전문기자 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