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유일의 4선 대통령
부유했지만 약자의 소리 경청
온화하지만 단호한 리더십으로 위기때 마다 유권자 지지 얻어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었던,12년여에 이르는 전대미문의 특별한 역사를 한 사람의 지도자가 이끌었다는 사실은 전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그 역사도 갈등과 실패로 얼룩진 간단치 않은 과정이었다는 것을 이 책 《위대한 정치의 조건》은 낱낱이 소개하고 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전설적인 단어 '뉴딜'이 당시에도 진부한 말이었다는 점이다. 뉴딜은 처음부터 잘 정리된 정책이 아니었다고 하니 더욱 충격적이다. 대공황이라는 초유의 위기에 맞서는 과정에서 단기적인 처방과 근본적인 처방이 결합된 형태로 서서히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한 것,그것도 정치적 이해관계를 고려해가며 조율한 결과물이 바로 뉴딜정책이라는 것이다. 시장경제가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인용되는 해법,뉴딜은 이처럼 특정 시기,특정 조건에 맞춰진 특이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뉴딜의 명성을 떠받치는 더 굳건한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뉴딜정책이 만들어지고 집행된 과정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진보주의자였던 루스벨트는,족보를 중시하고 집중제를 지향하는 이 땅의 진보주의자들과는 생각과 행동이 아주 달랐던지 편협하지 않았고 다원주의를 숭상했다. 아니,다원주의의 화신이었다.
그 결과,귀를 너무 열어둔 나머지 의견이 자주 충돌했고 갈등이 격해지기도 했지만 결코 완고하지는 않았기에 늘 바른 길을 찾아갈 수 있었다. 절차를 중시하는 자유민주주의의 강점이 바로 이런 것 아니겠는가. 다원주의를 존중해서 분권과 지방주의를 추구했던 루스벨트는 다양한 계층으로부터 지지를 획득하는 정치적 부수입을 챙기기도 했다. 아,여기서 한 가지 더 지적해야 할 점은 뉴딜은 절대 중앙집중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책의 1부는 루스벨트 대통령 취임 초기 뉴딜정책 100일의 여정을 아주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그것도 가감 없이 성공과 실패를 모두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참고할 점이 많다.
하지만 이 책의 압권은 2부다. '정치 천재'로 불릴 만한 루스벨트가 어떻게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어떻게 의회에서 민주당 장기집권 시대를 열었으며,어떻게 그런 정치적 자산을 활용해 뉴딜정책과 관련한 입법을 구현했는지를 자세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주로 온화하고 느리지만 때론 단호하고 전격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관철시켜 나갔던 그의 정치행적을 읽다 보면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영화 '진주만'을 본 사람들은 잘 기억할 것이다. 진주만 습격을 당한 뒤 참담한 상황에서 일본 열도에 대한 보복 공습을 결정할 때,불가능하다며 반대하는 군 장성들 앞에서 힘겹게 혼자 힘으로 휠체어에서 몸을 일으켜 "내 앞에서 다시는 안 된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외치던 루스벨트의 모습을! 이 책의 3부는 2차세계대전이라는 위기를 다시 한번 기회로 바꾼 루스벨트의 리더십에 관해서도 다루고 있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 이렇게 적고 있다. "여러 면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대통령 재임은 역사적인 경이였다. 그 고유의 시기와 장소에서 유래되고,지속적인 사회적 상호작용 및 문제 해결에 대한 가정이 낳은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의 대통령 재임 시 쟁점과 그 당시의 복잡한 정치,리더십,재능은 그때와 같은 조합으로 다시 일어날 수 없다. 그러나 그 특유의 시기와 환경에서 봤을 때,루스벨트의 대통령 재임은 전례 없는 영역에서 전례 없는 기간 동안 지속된 위기에 대해 미국 대통령으로서 창의적인 대응을 보여준 멋진 모범이었다. "
후배 정치인들로서는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루스벨트는 엄연히 실존 인물이고 무려 4번이나 국민의 자발적 선택을 받은 인물이다.
미국 대통령이지만 이제는 '대통령 리더십'의 전범이기도 한 루스벨트로부터 한수 배우길 원한다면 꼭 한번 읽어보길 권한다. 특히 2년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겐 필독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울러 지난 2일 지방선거로 권좌에 오를 200여명의 지방자치단체장들에게도 정권인수 기간에 축하 모임에나 다니면서 흥청망청할 것이 아니라 차분히 앉아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뭘 알아야 면장이라도 해 먹지 않겠는가?
이종훈 시사평론가(정치학박사 · CBS '이종훈의 뉴스쇼' 앵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