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사랑의 기억과 흔적 모아 박물관 만들었죠"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터키 소설가 오르한 파묵(58)의 장편소설 《순수 박물관》(전2권 · 민음사 펴냄)이 번역돼 나왔다.

이슬람 문화와 세속화된 서구 민주주의와의 관계,문명의 충돌 등을 화두로 삼았던 파묵은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남녀 간의 사랑을 주제로 삼았다. 그것도 순수하다 못해 지독하고 처절한 사랑 이야기다.

번역자인 이난아씨(한국외국어대 강사)가 최근 이스탄불에서 파묵을 만나 작품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이씨는 파묵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소개해 온 터키문학 전공자다. 인터뷰 내용을 요약한다.

▼미국 인도 멕시코 등 출간하는 나라마다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순수 박물관》은 어떤 소설인가요.

"사랑을 칭송하거나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설명한 작품은 아니에요. 사랑이 우리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고심하며 쓴,무척 무거운 면이 있는 소설이죠.부유한 섬유기업가의 아들인 서른 살의 케말은 가문 좋고,유럽에서 공부한 시벨과 약혼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먼 친척인 가난한 집안의 소녀 퓌순에게 빠져들어요. 농담처럼 가볍게만 생각했던 퓌순이 사라지면서 30년간 그녀를 그리워하고 추적하는 내용입니다. 순결,성,우정,결혼,행복과 같은 주제가 소설의 심장부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

▼왜 제목이 '순수 박물관'인가요.

"하나의 정답은 없습니다. 저에게 제목은 소설 안에 있는 비밀에 무엇인가 한술 더 떠넣는 것입니다. '순결'은 '순수'와 관련이 있지요. 저녁에 모여 TV를 보는 '순진한' 사람들,삶에 대한 '순수함'을 잊고 교활한 행동을 하는 부분들도 있는 그대로 서술하려고 했습니다. 독자들이 900쪽을 다 읽고 나서 '왜 순수일까' 자문하며 이 소설을 기억하길 바랍니다. "

▼당신의 어떤 소설보다도 사랑이라는 테마를 깊고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순수 박물관》은 단지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에 대해 성찰하는 소설입니다. 터키는 남녀가 쉽게 한자리에 있을 수도,만나서 사랑에 대한 생각들을 나누고 관계를 발전시킬 수도 없었던 나라입니다. 지금도 이런 면이 어느 정도 남아있지요. 이런 문화 속에서 남녀의 시선이나 의식,행동,눈썹을 치켜올리는 모습,신호들은 부각되지요. "

▼이 소설을 위해 실제로 세계의 많은 박물관을 방문했다고 들었습니다.

"남자 주인공 케말은 단 44일 동안 사랑을 나눈 한 여자를 평생 사랑하면서 그녀의 물건을 모으고,그 추억의 물건들로 박물관을 만듭니다. 저는 서양의 컬렉터(수집가)가 왜,어떻게 등장했는지,그들의 영혼을 연구하려고 노력했어요. 꼭 규모가 크고 민족적인 요소가 깃든 곳만이 박물관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자신의 고통과 상처,인생의 슬픈 사건,마음 속에 숨겨 두었던 욕구를 표현하고 싶은 사람들도 박물관을 만듭니다. "

▼소설과 같은 이름의 '순수 박물관'을 개관한다면서요.

"소설을 계획했던 10년 전부터 박물관 건립도 함께 생각했어요. 오는 8월 말 개관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늦어도 올해 안에는 선보일 거예요. 케말이 사랑했던 여인이 사용한 귀걸이와 머리핀뿐만 아니라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됐던 당시 터키의 물건들도 전시할 겁니다. "

▼노벨상 수상 이전에도 한국에서는 《새로운 인생》 《내 이름은 빨강》 등이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과거에 동양 세계가 공유했던 문화,이제는 과거로 남은 그 무엇을 내가 발견하고 전통과 현대적 정체성 사이에서 가슴 아파하지 않는 대신 현대적인 언어로 재창조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

▼한국에 대한 인상은 어떤가요.

"한국과 터키는 많은 면에서 닮았어요. 아직 중심부에 속하지는 않았고 자신만의 고유한 역사가 있지만 자신들의 문화가 충분히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데 불만을 갖고 있다는 의미죠.터키 사회는 최근 15~20년 사이에 눈부시게 성장한 한국 경제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단지 경제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문화적 성장,거대한 서점들,풍요로운 삶과 현대성,한국의 변화상이 관심을 끕니다. "

▼터키가 참전했던 한국전쟁이 60주년을 맞는데,터키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한때는 의미가 있었죠.그 당시 세계는 냉전으로 인해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고 터키도 한국전에 참여했으니까요. 제 이모부도 한국에 가서 싸웠어요. 그러나 한국전은 이제 나이 든 터키인들의 기억 속에만 있고 대신 양국 사이에 형제애가 남았다고 봅니다. 터키 문화와 한국 문화 사이의 연관성,전쟁으로 인한 전우애와 우정 같은 것 말이죠."

▼양국 간의 형제애와 우정은 두 사람이 피부를 베어 피를 섞는 '칸카르데쉬'라고 볼 수 있을까요.

"'칸카르데쉬'는 인생을 마감할 때까지 형제가 되는 것이죠.터키와 한국은 잊지 못할 칸카르데쉬입니다. "

정리=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