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일때도 창의력 투자는 아낌없이…100년 몽블랑 비결이죠"
1990년 10월3일 냉전의 상징이었던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은 헬무트 콜 서독 총리와 디메제이로 동독 총리가 몽블랑 만년필로 '통일 조약서'에 서명한 직후였다. 그로부터 정확히 7년2개월 뒤 대한민국의 경제주권이 국제통화기금(IMF)으로 넘어간 바로 그날,구제금융 신청서에 서명하던 임창열 당시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의 손에 들린 것도 몽블랑 만년필이었다.

1906년 독일에서 탄생한 몽블랑이 '20세기를 기록한 펜'으로 불리는 것은 이처럼 역사의 순간마다 함께했기 때문이다. 하긴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과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대통령 등 20세기 세계사를 써내려간 인물들이 하나같이 몽블랑의 열렬한 팬이었으니,이런 별명이 과장인 것만은 아니다. 국내에서도 몽블랑 만년필을 수십개나 모았다는 고(故) 이병철 삼성 창업주를 비롯해 지금도 힘깨나 쓴다는 유력 인사들의 와이셔츠 포켓에는 몽블랑 펜이 꽂혀 있다.

몽블랑의 어떤 매력이 전 세계 명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루츠 베이커 몽블랑인터내셔널 대표(55)는 "어느덧 몽블랑 펜이 이 시대의 성공과 권력,그리고 지성의 상징이 된 덕분"이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베이커 대표는 2004년부터 몽블랑을 이끌고 있는 글로벌 명품업계의 리더.올해로 19회째를 맞은 '몽블랑 문화예술 후원자상'을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에게 수여하기 위해 지난 25일 방한한 그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만났다.

그는 몽블랑이란 브랜드에 함축된 가치를 설명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에서는 몽블랑 펜이 '파워 펜'으로 불립니다. 대다수 인수 · 합병(M&A)이 몽블랑 펜 끝에서 이뤄졌기 때문이지요. 이러다 보니 '몽블랑 펜을 꺼낸다'는 것은 '중요한 서류에 서명한다'는 의미를 갖게 됐습니다. "

하지만 몽블랑은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워터맨 파커 등과 엇비슷한 브랜드였다. 그랬던 몽블랑이 개당 300달러가 넘는 고급 필기류 시장의 70%가량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한 시장분석과 과감한 개혁 덕분이었다.

"PC가 빠른 속도로 보급되던 때였습니다. 당시 경영진은 '이제 만년필의 기능적인 측면은 점차 사라지겠구나' 하고 예상했지요. 하지만 감성적인 측면은 시대가 바뀌어도 유지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그래서 20달러 이하 중저가 모델 생산을 중단하고 고급 모델에 집중하기로 한 겁니다. 장인들에게 이제 '몇개를 생산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훌륭한 제품을 생산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일깨워줬지요. 지금도 공장에 가면 장인들이 멀쩡한 펜들을 쓰레기통에 던집니다. '돋보기로 봤더니 미세한 스크래치가 있더라'는 이유를 대더군요. "

수많은 브랜드가 명멸하는 명품업계에서 몽블랑이 100년 넘게 최고의 브랜드 가치를 유지해 나가는 비결은 뭘까. 베이커 대표는 "어려운 시기를 맞아 이런저런 '비용(cost)'을 줄일 때도 '창조력(creativity)'을 끌어올리는 데 드는 돈만큼은 아끼지 않은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고객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감동을 주는 제품을 기대하기 때문에 창의력에 대한 투자를 늦추는 순간 해당 브랜드가 도태된다는 이유에서다.

베이커 대표는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작년 1월에 내놓은 3억원짜리 '투르비옹'(중력 오차를 줄여주는 부품) 시계를 예로 들었다. 그는 "당시 시장이 워낙 침체된 탓에 모두들 값비싼 시계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지만 창의성에 반한 고객들은 앞다퉈 구매에 나섰다"며 "덕분에 지난해 생산 물량이 3개월 만에 동났다"고 설명했다. 베이커 대표의 목표는 만년필로 얻은 몽블랑의 명성을 시계와 보석,여성용 잡화 등으로 확대해 나가는 것이다. 특히 1997년 시작한 시계 사업은 그의 강력한 리더십에 힘입어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몽블랑의 주력 사업으로 커나가고 있다. 그는 "현재 몽블랑 매출의 18%를 차지하고 있는 시계 부문은 빠르면 5년 뒤 필기구 부문(45%)을 뛰어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베이커 대표는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럭셔리 산업은 꾸준히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인류에게 '사랑'이란 단어가 존재하는 한 럭셔리 산업은 성장할 겁니다. '내가 당신을 이렇게 사랑한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데 명품은 괜찮은 표현 수단이지요. 몽블랑은 이런 가치를 고객에게 제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겁니다. "

오상헌/안상미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