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 매니지먼트] 인물 탐구 - 리처드 힐 SC제일은행장
"꺄~ 제임스 본드다!"

지난 1월 어느날 오전 광주에 있는 SC제일은행 금남로5가 지점.여느 은행 영업점과 다름없이 조용하던 이곳에 갈색머리와 파란 눈의 한 외국인 남성이 들어서자 여직원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만면에 미소를 띠고 객장에 선 그가 좌중에게 손을 흔들며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 억양은 다소 어눌했지만 분명한 한국어로 말하는 그를 향해 직원들은 물론 영업점을 방문한 고객들까지 모두 박수로 화답했다.

주인공은 SC제일은행의 러처드 힐 행장(45).186㎝의 훤칠한 키에 잘생긴 이목구비를 갖췄다. 운동으로 단련된 몸은 영화주인공 제임스 본드를 연상시킨다. 그러다보니 팬(?)층이 두텁다. 영업점을 방문할 때마다 여기저기서 사인이나 사진 촬영 요청은 물론 선물 공세도 이어진다. 꽃다발에서 호랑이 인형까지 품목과 종류도 다양하다.

은행 내에서 그가 인기몰이를 하는 이유는 외모 때문만이 아니라는 게 주위의 평가다. 열정적인 업무 태도와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성격,한국에 하루라도 빨리 동화되려는 노력이 진짜 비결이라고 한다.

학원 다니는 행장님
한국어 모르면 현지 영업도 못해…빨리 배우려 아내와 경쟁하기도

◆"한국어를 깨쳐야 진짜 은행장"

힐 행장은 2008년 1월 한국에 왔다. SC제일은행 부행장으로 부임하면서부터다. 가장 먼저 한 일은 한국어 학원 등록.그 뒤 지금까지 서울 광화문에 있는 학원에서 매일 한 시간씩 한국어 수업을 듣는다. 학원을 오가면서는 주위의 간판을 읽는다. 한국어를 익히기 위해서다.

학원에서만이 아니다. 시간 날 때마다 한국어를 공부한다. 지난 16일엔 9시간을 투자했다. 한국어를 빨리 배우기 위해 아내 수전과도 경쟁하고 있다. 수전은 한식 요리학원에서 한국어로 강의를 듣는다. 힐 행장은 "시간이 없다보니 아내에게 한국어 실력이 뒤졌다"고 아쉬워 한다. 하지만 그의 한국어 실력은 수준급이다. 영업점 직원이나 고객을 만나 대부분 대화를 한국어로 할 정도다. 직원들과 어울리면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을 멋들어지게 부르기도 한다.

그가 이처럼 한국어 배우기에 집착하는 것은 "언어는 현지 문화를 체득할 수 있는 통로"라는 생각에서다. 그는 "현지 언어를 배워야만 현지인의 감정과 문화 예법 등 미묘한 부분까지 알 수 있다"며 "그걸 알아야 현지 영업도 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은행 내 공식 언어를 한국어로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다른 나라에서도 그랬다. 이탈리아에서 근무할 때는 3개월 만에 이탈리아어를 깨쳤다. 그리스어는 2년 만에 능통하게 됐다. 프랑스어도 1년 만에 마스터했다. 힐 행장의 올 목표는 통역 없이 한국어로 은행 내 회의를 주재하는 것."그래야만 한국 은행의 진짜 은행장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다둥이 아빠의 직원 사랑

서울 지하철 1호선 종각역 SC제일은행 본점 빌딩 11층에 마련된 힐 행장의 집무실은 조그마하다. 대신 보신각이 한눈에 내려다보일 만큼 전망이 좋다. 각종 상패,상장이 전시돼 있는 책장에는 다섯 식구가 함께 찍은 사진첩 하나가 놓여 있다.

힐 행장은 다둥이 아빠다. 영국에서 대학(엑세터대)을 졸업하던 23세에 아내 수전과 결혼,로비(16) 조지(14) 잭(12) 등 아들만 셋을 뒀다. 아들 셋은 모두 한국에 산다. 교육을 위해 자녀를 본국에 남겨두고 단신 부임하는 다른 외국인 임원과는 다르다. 아들들은 휴일에 지하철을 타고 단편영화를 찍으러 돌아다닌다. 현지 문화를 체득하라는 힐 행장의 뜻에 의해서다.

힐 행장의 이 같은 가족 사랑은 직원들을 가족처럼 여기는 경영 방침과도 무관치 않다. 동료들 간 치열한 경쟁보다는 신뢰와 협력을 강조한다. 작년 12월17일 은행장에 취임한 뒤 6개월 동안 80여개 영업점을 방문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변신은 무죄…술 회사에서 은행 CEO로

힐 행장이 은행원으로 변신한 것은 4년 전이다. 2006년 1월 싱가포르에 있는 스탠다드차타드(SC) 그룹 소매금융본부 최고재무책임자(CFO)로 영입돼 금융인으로 변신했다. 그 전까지는 '발렌타인'으로 잘 알려진 위스키 제조회사인 얼라이드 도메크(Allied Domecq PLC)에서 약 20년간 일했다.

그가 처음 얼라이드 도메크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87년.1989년 이탈리아 판매법인을 거쳐 유럽 전체의 마케팅을 총괄하는 자리에 올랐다가 1997년엔 그리스 법인 CEO로 발탁됐다.

여기서 시련에 부닥쳤다. 부실이 엄청났다. 누구 하나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혼자 판단하고,혼자 실행해야 했다. 하지만 난관을 이겨내는 데는 6개월로 충분했다. "원칙을 세워 신념을 갖고 실행한 결과 6개월 만에 정상화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Carpe Diem
스포츠광답게 열정적 현장경영…6개월만에 영업점 80여곳 방문

힐 행장은 곧바로 그룹 CFO와 최고운영책임자(COO)를 겸임하는 자리에 올랐다. 2002년 7월엔 뉴욕증권거래소 상장을 성공시켰다. 2001년 9 · 11테러와 엔론 사태가 터진 이후 강화된 심사를 통과해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첫 외국계 회사였다. 그의 몸값이 올라간 건 당연했다.

승승장구하던 그는 2005년 갈림길에 섰다. 업계 2위였던 얼라이드 도메크가 3위 업체에 인수당해 버린 것.이때 SC그룹에서 영입 제의가 왔다. SC는 그룹의 다양성을 꾀하기 위해 다른 업종에서 일했던 사람을 물색하고 있었다.

힐 행장은 "SC그룹 전략담당 임원은 공군 출신 여성"이라며 "다른 업종에서 일했던 경험이 은행 생활에 엄청나게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그가 SC제일은행에서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을 강조하고 나선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그는 "기업에 있어보니 현금흐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됐다"며 "중소기업들이 필요할 때 찾는 은행을 만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Carpe Diem…현재에 충실하라

힐 행장의 목에는 철심이 박혀 있다. 5년 전 럭비를 하다가 목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어서다. 그만큼 그는 스포츠광이다. 못하는 스포츠가 없다. 어렸을 때는 축구선수를 꿈꿨다. 지금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명문 구단인 아스널의 열렬한 팬이다. 학교 다닐 때부터 중상을 입기 전까지는 30여년을 아마추어 럭비 선수로 뛰었다. 테니스 스키 수영도 수준급이다.

운동을 좋아해서일까. 그의 좌우명은 '현재에 충실하라(Carpe Diem)'다. 하루하루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자는 의미다. 힐 행장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면서 좌우명으로 삼겠다고 생각했는데 성격과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좌우명처럼 그는 열정적이다. 틈만 나면 지점을 찾는다. 축구 등을 하며 직원들과 수시로 어울린다. 중소기업 등 고객들과도 함께한다. 점심과 저녁도 먹고 필요하면 폭탄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가 은행장으로서 지향하는 방향은 명확하다. "한국에서 고객들과 영원히 함께하며 정말 신뢰받는 은행을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매일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며 "일관성 있는 리더십을 구축하고 싶다"고 말했다.

"목표가 얼마만큼 실현됐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대뜸 "화장실에 가겠다"고 일어섰다. 농담이었다. 자신과 리더십에 대한 평가는 직원과 고객들에게 듣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의미였다. 어쩌면 그의 노력은 목표치에 이미 근접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영춘/이호기 기자 h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