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생명 공모 20조 '밀물'] "삼성이니까…" 쌈짓돈에 대출 얹어 사상최대 '청약전쟁'
4일 오전 11시.삼성생명 공모주 청약을 받고 있는 신한금융투자 명동지점 창구에서 작은 실랑이가 일어났다. 한 노인이 "내가 먼저 왔으니 먼저 주문을 넣겠다"며 앞에 선 다른 투자자와 신경전을 벌인 것.이미 순번이 지난 대기표를 내민 그의 손에는 인근 다른 증권사들의 대기표가 수십장이나 들려 있었다. 그는 "한 주라도 더 받으려고 다른 객장에 나가 있는 친구들과 수시로 전화통화를 해 경쟁률을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3,4일 이틀간 진행된 삼성생명의 공모주 청약 분위기는 예상보다 훨씬 뜨거웠다. 해마다 연말이면 벌어지는 '입시전쟁'을 방불케 할 정도로 청약 경쟁률이 낮은 증권사를 찾는 눈치작전이 치열했다. 쌈짓돈을 꺼내 처음으로 공모주 청약에 나선 투자자들도 상당수였다.

◆갈 곳 없는 돈,'청약전쟁'

조용현 하나대투증권 투자전략팀장은 "20조원에 달하는 청약 증거금은 1999년 KT&G의 11조5768억원을 뛰어넘는 사상 최대 규모"라며 "시중에 떠도는 부동자금이 많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혀를 내둘렀다.

이번 삼성생명 공모에 참여한 투자자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은 청약 이유는 "마땅히 투자할 데가 없기 때문"이다. 동양종금증권 명동지점에서 만난 박모씨(41)는 "은행 상품도 이것저것 비교해봤지만 최대로 받을 수 있는 금리라고 해봐야 고작 연 3% 정도"라며 "목돈 굴리기가 정말 마땅치 않다"고 토로했다.

그는 "주식투자 경험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은행 예금보다는 낫겠지 싶어 여유자금을 넣어두려 청약했다"고 말했다. 60대 투자자는 기자의 질문에 되레 "요즘 정말 돈 넣어둘 데가 없지 않냐.기자 양반이 괜찮은 데 알면 좀 알려달라"고 반문했다.

이 같은 열기를 반영하듯 증권사 객장마다 직원들이 점심식사를 거르는 것은 물론 에어컨을 풀가동하느라 분주했다. 한 지점의 경우 실내온도는 22도인데도 직원과 고객 50여명이 빼곡한 탓에 객장 내 에어컨 10대를 틀고도 땀을 흘려야 했다. 최성호 삼성증권 압구정지점 PB(프라이빗뱅커)는 "삼성전자 주식을 100억원어치나 갖고 있는 고객이 이것을 담보로 50억원을 대출받는 등 있는 돈 없는 돈 다 긁어 가져오신다"고 귀띔했다.

◆"삼성이니까"…투자자들 기대 높아

공모가가 11만원으로 낮지 않은데도 청약에 나서는 투자자들은 한결같이 "삼성이니까"라고 답했다. 한 은행원은 "인터넷으로도 청약을 할 수 있었지만 주위 눈치도 보이고 해서 점심시간을 이용해 잠깐 객장을 찾았다"며 "삼성생명이면 적어도 삼성전자 정도의 위치까지는 오를 수 있지 않겠냐"고 기대했다. 5억원을 들여 1만주를 청약했다는 김명관씨(78)는 "공모주 청약은 이번이 처음인데 돈을 넣어둘 곳이 마땅치 않아 왔다"며 "삼성생명이니 배당도 잘 줄 것 같고 웬만한 부동산이나 채권보다는 낫지 않겠냐"고 말했다.

이재홍 한국투자증권 명동지점장은 "청약하는 고객 중 공모주 투자를 처음하는 고객이 30% 정도 된다"면서 "다른 공모주 청약 때 비율이 10%도 채 안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는 "저축은행 등 상대적으로 고금리였던 제2금융권에서 넘어온 자금도 꽤 되는 걸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성공률 높이자' 주식담보대출도 급증

삼성생명이 시중자금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며 경쟁률이 치솟자 투자자들은 배정 확률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구사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가족을 동원해 계좌 수를 늘리는 방법.

삼성증권 압구정지점엔 가족 수대로 계좌를 만들어 한꺼번에 220억원을 투자한 고객만 무려 3명이나 된다. 자녀 이름으로 모두 4개의 계좌를 터 계좌당 최대 청약한도인 55억원씩을 넣은 것이다. 일부 투자자는 친구들과 함께 팀을 만들어 여러 증권사에 계좌를 튼 다음 경쟁률이 낮은 증권사 순으로 투자자금을 분산해 넣기도 했다.

주식담보대출 등을 이용해 청약자금을 불린 투자자들도 상당수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3일 기준 증권사의 예탁증권 담보융자 잔액은 5조1882억원으로 하루 만에 1652억원 증가했다. 한국투자증권을 포함한 6대 주관 증권사의 경우 주식담보와 신용대출을 포함한 신규 대출이 최근 사흘간 700억원 가까이 늘어났다. 대출 신청이 워낙 많다 보니 청약을 받는 창구만큼이나 해당 부서 직원들도 애를 먹었다는 전언이다.

한국투자증권 압구정지점에서 청약 신청을 한 박재영씨(40)는 "25억원의 증거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출이란 대출은 다 받았다"며 "평소엔 공모주 투자에 3억~4억원가량 넣었지만 이번엔 삼성생명이라 조금 무리해서 돈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그는 대출로 충당한 부분은 상장 이후 주가가 오르면 바로 차익을 실현할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강지연/강현우 기자 sere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