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업 "무조건 싸게"…증권사 "따내고 보자" 금융시장 혼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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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료 덤핑' 배경은
"요즘 사장님께 호출 당해 불려다니며 해명하고 설득하느라 죽을 맛입니다. "
대형 증권회사의 투자은행(IB)업무 담당 고위 임원은 '왜 중요한 공기업 입찰성적이 부진하냐'는 사장 성화에 시달린다며 한숨을 지었다. 덤핑이 횡행하는 비정상적인 경쟁환경에다 수주해봐야 남는 것도 없다는 내막을 얘기해도 '무조건 따내라'는 지시가 내려와 곤혹스럽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자본시장연구원 관계자는 "덤핑입찰과 수수료 경쟁의 일상화는 업계가 공멸에 이르는 길"이라고 지적했다.
◆1조원 딜,보장수수료 2억원 남짓
예금보험공사는 지난달 9일 우리금융 지분 9%를 성공적으로 매각해 1조1606억원의 공적자금을 회수했다. 블록세일 매매가는 보통시세보다 3~5% 낮기 때문에 우리금융도 3.75%까지 할인해 팔 방침이었지만 가격할인 없이 전날 종가에 거래가 성사됐다. 열심히 세일즈에 나선 결과 해외 투자자들이 대거 참여, 최대 7%로 잡았던 매각 주식 지분도 9%로 확대됐다.
이같은 성공적인 결과에 딜을 주관했던 삼성 · 대우 · UBS · CS 등 4개 증권사 관계자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거래 기본수수료를 전부 0~0.02%대로 적어내 보장받은 수입이 기껏해야 2억6000만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딜에 참가했던 증권사 관계자는 "할인 없이 팔릴 경우 회사별로 0.3~0.4%의 성과보수를 책정받았지만 그동안 대형 딜이 '이븐파'(무할인)로 성사된 사례가 거의 없어 기대하지 않았는데 결과가 좋아 손해는 면했다"고 전했다.
반면 우리금융 블록세일이 열리기 3주 전에 있었던 하이닉스 블록세일에 참가한 우리투자 · 대우 · 노무라 등 6개 증권사들은 0.3%의 기본수수료를 보장받고 딜을 시작했다. 당시 외환은행 등 8개 채권단은 지분 6.67%를 가격할인 없이 매각하는 데 성공,9200억여원을 회수했다. 성과 인센티브도 0.8~0.9%씩 받아 총 1.1~1.2%의 짭짤한 수입을 거뒀다. IB업계 관계자는 "예보나 자산관리공사 딜의 경우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기본수수료가 거의 '제로(0)'수준에서 결정되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설명했다.
◆'0.01% 덤핑 입찰' 전방위 확산
공기업 관련 덤핑 입찰은 시장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 기업공개(IPO) 시장의 출혈경쟁이 심해 '1bp(0.01%)' 입찰이 잇따른다. 미래에셋증권이 지난해 9월 한국관광공사 자회사인 그랜드코리아레저(GKL) IPO 수수료를 0.01%로 따낸 게 출발점이다. 작년 말 인천공항공사 주관사 선정 때도 0.01% 입찰이 등장했다. 당시 동양종금 · 현대 · 미래에셋증권 컨소시엄이 0.01%를 써냈지만 삼성 · 대우 · 대신증권 컨소시엄에 과거 실적 평가에서 밀렸다. 삼성 측은 0.10%를 적어냈지만 이 역시 통상 1.0~3.0%인 IPO 수수료에 크게 못 미치는 손해나는 장사다.
저가 입찰에 대한 압박은 글로벌 투자은행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메릴린치는 작년 10월 삼정KPMG와 공동으로 대우인터내셔널 매각주관사에 뽑힐 당시 0.05% 안팎의 낮은 수수료를 써낸 것으로 전해졌다. 3조원대 초대형 딜의 수입이 고작 20억원 정도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우리투자증권 IB 관계자는 "과거 대형 인수합병(M&A)을 주선하면 100억~200억원을 벌 수 있었지만 이제는 10억~20억원으로 수입이 급감했다"고 말했다.
◆퇴직연금 금리 경쟁도 공기업이 주도
금융회사 간 제살깎기식 고금리 경쟁이 펼쳐지고 있는 퇴직연금시장의 혼탁을 부채질하는 주역도 공기업들이다. 이들은 금융당국이 '좌시하지 않겠다'며 수차례 경고를 보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다. 한국수력원자력 사례가 대표적이다. 한수원은 최근 퇴직연금 납입일을 당초 예정한 오는 24일에서 6일로 앞당겼다. 금융감독원이 금리경쟁을 하지 못하도록 오는 7일부터 관련 규제를 강화하는 것을 피하기 위한 편법 대응이란 분석이다.
특히 퇴직연금의 주무부처인 노동부 산하 근로복지공단마저 금리경쟁을 부추기는 판이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시장 선점이 절박한 사업자들은 역마진을 감수하고 출혈경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업계에선 금리경쟁으로 인해 퇴직연금사업자들이 떠안아야 할 손실이 올해만 500억원을 웃돌 것으로 보고 있다.
◆공기업 경영감시 강화가 오히려 '독'
이처럼 덤핑이 횡행하는 것은 증권사들은 IB업무를 강화하고,공기업들은 주관사 선정 평가 때 수수료 비중을 높게 반영하는 입찰제도를 운영하는 것이 맞물린 탓이다. 삼성증권 관계자는 "다양한 평가기준을 고려하는 민간기업 입찰과 달리 20%의 높은 수수료 배점이 사실상 당락을 결정하는 요인"이라고 말했다. 기술평가 점수(80%)는 각기 컨소시엄을 구성하므로 변별력이 별로 없다는 설명이다.
공기업들이 싼 수수료를 고집하는 이유는 감사원 기획재정부 등의 획일화된 경영평가 때문이란 지적이다. IB업계 관계자는 "감사원이 몇 해 전부터 단순 회계감사에서 벗어나 경영감사를 강조하면서 수수료 인하 압력이 커지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금융공기업 경영혁신 추진실태 감사' 등의 이름으로 이른바 '시스템 감사'를 강화한 탓에 비용인 수수료를 한푼이라도 아끼는 데 주력할 수밖에 없다는 진단이다.
재정부가 지난해부터 공기업 경영평가를 대폭 강화한 것도 압박요인이다. 재정부 관계자는 "수수료를 공기업 경영성과와 연계하지는 않지만 부실자산 매각 성과는 당연히 경영평가에 반영된다"고 설명했다.
예보 관계자는 "공기업들이 수수료를 짜게 책정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세금으로 비용을 지불한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수수료 깎기가 역효과를 낸다는 우려도 나온다. 대우증권 관계자는 "파는 쪽의 수수료가 박하면 중개자는 수수료를 후하게 쳐주는 매수자에게 유리하게 거래를 진행시킬 유인이 생긴다"며 "수수료 아끼려다 물건 값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백광엽 기자 kecorep@hankyung.com
대형 증권회사의 투자은행(IB)업무 담당 고위 임원은 '왜 중요한 공기업 입찰성적이 부진하냐'는 사장 성화에 시달린다며 한숨을 지었다. 덤핑이 횡행하는 비정상적인 경쟁환경에다 수주해봐야 남는 것도 없다는 내막을 얘기해도 '무조건 따내라'는 지시가 내려와 곤혹스럽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자본시장연구원 관계자는 "덤핑입찰과 수수료 경쟁의 일상화는 업계가 공멸에 이르는 길"이라고 지적했다.
◆1조원 딜,보장수수료 2억원 남짓
예금보험공사는 지난달 9일 우리금융 지분 9%를 성공적으로 매각해 1조1606억원의 공적자금을 회수했다. 블록세일 매매가는 보통시세보다 3~5% 낮기 때문에 우리금융도 3.75%까지 할인해 팔 방침이었지만 가격할인 없이 전날 종가에 거래가 성사됐다. 열심히 세일즈에 나선 결과 해외 투자자들이 대거 참여, 최대 7%로 잡았던 매각 주식 지분도 9%로 확대됐다.
이같은 성공적인 결과에 딜을 주관했던 삼성 · 대우 · UBS · CS 등 4개 증권사 관계자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거래 기본수수료를 전부 0~0.02%대로 적어내 보장받은 수입이 기껏해야 2억6000만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딜에 참가했던 증권사 관계자는 "할인 없이 팔릴 경우 회사별로 0.3~0.4%의 성과보수를 책정받았지만 그동안 대형 딜이 '이븐파'(무할인)로 성사된 사례가 거의 없어 기대하지 않았는데 결과가 좋아 손해는 면했다"고 전했다.
반면 우리금융 블록세일이 열리기 3주 전에 있었던 하이닉스 블록세일에 참가한 우리투자 · 대우 · 노무라 등 6개 증권사들은 0.3%의 기본수수료를 보장받고 딜을 시작했다. 당시 외환은행 등 8개 채권단은 지분 6.67%를 가격할인 없이 매각하는 데 성공,9200억여원을 회수했다. 성과 인센티브도 0.8~0.9%씩 받아 총 1.1~1.2%의 짭짤한 수입을 거뒀다. IB업계 관계자는 "예보나 자산관리공사 딜의 경우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기본수수료가 거의 '제로(0)'수준에서 결정되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설명했다.
◆'0.01% 덤핑 입찰' 전방위 확산
공기업 관련 덤핑 입찰은 시장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 기업공개(IPO) 시장의 출혈경쟁이 심해 '1bp(0.01%)' 입찰이 잇따른다. 미래에셋증권이 지난해 9월 한국관광공사 자회사인 그랜드코리아레저(GKL) IPO 수수료를 0.01%로 따낸 게 출발점이다. 작년 말 인천공항공사 주관사 선정 때도 0.01% 입찰이 등장했다. 당시 동양종금 · 현대 · 미래에셋증권 컨소시엄이 0.01%를 써냈지만 삼성 · 대우 · 대신증권 컨소시엄에 과거 실적 평가에서 밀렸다. 삼성 측은 0.10%를 적어냈지만 이 역시 통상 1.0~3.0%인 IPO 수수료에 크게 못 미치는 손해나는 장사다.
저가 입찰에 대한 압박은 글로벌 투자은행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메릴린치는 작년 10월 삼정KPMG와 공동으로 대우인터내셔널 매각주관사에 뽑힐 당시 0.05% 안팎의 낮은 수수료를 써낸 것으로 전해졌다. 3조원대 초대형 딜의 수입이 고작 20억원 정도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우리투자증권 IB 관계자는 "과거 대형 인수합병(M&A)을 주선하면 100억~200억원을 벌 수 있었지만 이제는 10억~20억원으로 수입이 급감했다"고 말했다.
◆퇴직연금 금리 경쟁도 공기업이 주도
금융회사 간 제살깎기식 고금리 경쟁이 펼쳐지고 있는 퇴직연금시장의 혼탁을 부채질하는 주역도 공기업들이다. 이들은 금융당국이 '좌시하지 않겠다'며 수차례 경고를 보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다. 한국수력원자력 사례가 대표적이다. 한수원은 최근 퇴직연금 납입일을 당초 예정한 오는 24일에서 6일로 앞당겼다. 금융감독원이 금리경쟁을 하지 못하도록 오는 7일부터 관련 규제를 강화하는 것을 피하기 위한 편법 대응이란 분석이다.
특히 퇴직연금의 주무부처인 노동부 산하 근로복지공단마저 금리경쟁을 부추기는 판이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시장 선점이 절박한 사업자들은 역마진을 감수하고 출혈경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업계에선 금리경쟁으로 인해 퇴직연금사업자들이 떠안아야 할 손실이 올해만 500억원을 웃돌 것으로 보고 있다.
◆공기업 경영감시 강화가 오히려 '독'
이처럼 덤핑이 횡행하는 것은 증권사들은 IB업무를 강화하고,공기업들은 주관사 선정 평가 때 수수료 비중을 높게 반영하는 입찰제도를 운영하는 것이 맞물린 탓이다. 삼성증권 관계자는 "다양한 평가기준을 고려하는 민간기업 입찰과 달리 20%의 높은 수수료 배점이 사실상 당락을 결정하는 요인"이라고 말했다. 기술평가 점수(80%)는 각기 컨소시엄을 구성하므로 변별력이 별로 없다는 설명이다.
공기업들이 싼 수수료를 고집하는 이유는 감사원 기획재정부 등의 획일화된 경영평가 때문이란 지적이다. IB업계 관계자는 "감사원이 몇 해 전부터 단순 회계감사에서 벗어나 경영감사를 강조하면서 수수료 인하 압력이 커지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금융공기업 경영혁신 추진실태 감사' 등의 이름으로 이른바 '시스템 감사'를 강화한 탓에 비용인 수수료를 한푼이라도 아끼는 데 주력할 수밖에 없다는 진단이다.
재정부가 지난해부터 공기업 경영평가를 대폭 강화한 것도 압박요인이다. 재정부 관계자는 "수수료를 공기업 경영성과와 연계하지는 않지만 부실자산 매각 성과는 당연히 경영평가에 반영된다"고 설명했다.
예보 관계자는 "공기업들이 수수료를 짜게 책정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세금으로 비용을 지불한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수수료 깎기가 역효과를 낸다는 우려도 나온다. 대우증권 관계자는 "파는 쪽의 수수료가 박하면 중개자는 수수료를 후하게 쳐주는 매수자에게 유리하게 거래를 진행시킬 유인이 생긴다"며 "수수료 아끼려다 물건 값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백광엽 기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