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알 · 호주달러 선풍.120엔 시대 개막!'

일본 니혼게이자이가 발간하는 격주간지 '펀드정보'의 지난 2월4일자 커버스토리 제목이다. 한국에선 금융전문가라도 무슨 뜻인지 선뜻 알기 어렵지만 일본인에게는 친숙한 내용이다. 은퇴 후 금융투자를 통해 노후생활을 꾸리는 고령사회인 일본에서 2000년대 들어 가장 인기 높은 금융투자 상품에 대한 기사이기 때문이다. 이는 '정기배분형 채권펀드'를 가리키는 것이다.

◆원금은 그대로,수익은 매달 입금

정기배분형 채권펀드는 고객 돈을 금리가 높은 국가의 국 · 공채에 투자하고 수익금을 매달 지급하는 펀드다. 주로 브라질과 호주 국채에 투자하다보니 기사 제목에서 브라질 헤알화와 호주 달러화를 언급했다.

원금은 채권에 투자하고 여기에서 나오는 이자를 매달 현금으로 지급한다. 수익률은 월 0.6~1.0% 사이다. 기사에서 언급한 '120엔 시대'는 1만엔을 투자했을 때 받은 월 수익금이 120엔에 도달했음을 부각시킨 것이다.

정기배분형 채권펀드는 자타가 공인하는 2000년대 일본 최고의 히트상품이다. 2001년 2조엔이던 펀드 설정 규모가 올 2월에는 15조8486억엔까지 늘어났다. 일본 내 전체 펀드 설정액의 33.7%로,주식형펀드(8조7716억엔)의 두 배에 가깝다.

정기배분형 채권펀드의 흥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자산운용사 '국제투신고문'은 지난해까지 관련 상품으로 3조엔 넘게 끌어모았다. 2008년 일본 피델리티가 60세 이상 퇴직자를 대상으로 '퇴직금을 어디에 투자했나'라는 설문(복수응답)에서 일본 주식 직접투자(57.7%)에 이어 두 번째로 정기배분형 채권펀드(37.0%)를 꼽았을 정도다.

◆고령층 공략이 성공 비결

2000년대 중반 75세 이상 고령자가 1000만명을 넘어선 일본의 인구 구조가 이 상품의 탄생과 성공 비결이다. 일본에선 주식을 포함해 금융투자의 80%(작년 기준)가 50대 이상 장 · 노년층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미래에셋 퇴직연금연구소의 류재광 연금연구팀장은 "발생하는 이익금을 바로 상환하다보니 펀드 특유의 복리 투자가 이뤄지지 않아 초기에는 실패한 금융상품으로 평가받았다"며 "매월 통장에 현금이 들어오는 걸 확인한 투자자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면서 흥행에 성공했다"고 말했다.

저금리와 부동산가격 하락으로 퇴직 후 '돈 굴리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매달 현금을 지급하는 상품모델이 투자자들에게 호응을 얻은 것이다.

수익률을 '%(퍼센트)'가 아니라 '1만엔을 넣었을 때 월 ○○엔 배분' 식으로 노인들이 알기 쉽게 표기한 '노인친화형 마케팅'도 주효했다. 류 팀장은 "투자설명서의 글자 크기를 키우고 판매사원들은 특별히 큰 목소리로 설명하도록 교육받는 등 노인층을 겨냥한 상품판매 기법까지 등장했다"고 설명했다.

국내에서 이 같은 금융상품이 판매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수익률이 연 5% 안팎인 상가나 오피스텔에도 뭉칫돈이 몰리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의아한 부분이다. 국내 자산운용사들은 가계자산에서 부동산 비중이 지나치게 높은 점을 이유로 꼽았다.

한 운용사 관계자는 "정기배분형 채권펀드는 거액의 금융자산에 장기 투자하는 사람들이 많은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는 상품"이라며 "펀드가 공격적인 중단기 투자 방식으로 인식되고 평균 납입기간이 3년에 불과한 국내에선 아직은 수요가 적을 것으로 판단해 상품을 출시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