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초 재일교포 기업인인 이희건씨는 한국에 제일투자금융을 설립하면서 당시 김준성 외환은행장에게 "믿을 만한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김 행장의 입에서는 주저 없이 대구은행장 시절 비서실장이었던 '라응찬'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로부터 33년 동안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72)은 신한금융그룹의 '전부'였다. 제일투금 상무와 신한은행 전무를 거쳐 1991년부터는 신한은행장을 지냈다. 2001년에는 신한지주 회장으로 선임돼 최고경영자(CEO)와 이사회 의장을 겸하면서 신한금융그룹을 국내 3위(총자산 기준)로 키워냈다.

신한지주 주주들은 라 회장의 이런 공로를 인정,24일 열린 주주총회에서 그를 대표이사 회장으로 재선임했다. 국내 금융계에서는 보기 힘든 4연임이다. 그렇지만 라 회장은 이날 직함 하나를 떼어냈다. 이사회 의장을 전성빈 사외이사(57 · 여 · 서강대 교수)에게 넘겨준 것.모든 걸 혼자 책임져왔던 라 회장으로선 앞으로 이사회 의장과 새로운 동거실험을 해야 하게 됐다.

◆신한지주 첫 이사회 의장 분리

신한지주 이사회는 이날 전성빈 교수를 이사회 의장으로 선임했다. 정부 방침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신한지주가 설립된 이후 CEO와 이사회 의장이 분리된 것은 처음이다. 은행권에서 첫 여성 이사회 의장이 된 전 교수는 미국 캘리포니아대에서 회계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회계 전문가다. 2007년부터 신한지주 사외이사를 맡고 있다.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으로 대인관계가 원만하면서도 할 말은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신한지주 관계자는 "전 교수가 저명한 경영학 및 회계학 전문가인 데다 신한지주 사외이사를 3년 동안 맡아 회사 내용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이사회가 의장으로 선임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신한지주는 당초 류시열 전 제일은행장을 이사회 의장으로 선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계의 원로인 그가 신한지주 사외이사를 5년 지내 경영진과의 호흡이 무난할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외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할 수 있다'는 사외이사 모범규준에 따라 이번에 비상임이사로 선임된 류 전 행장은 자격이 안 됐다는 후문이다. 일부에서는 금융당국에서 이날 사외이사로 선임된 김병일 전 기획예산처 장관을 이사회 의장으로 밀었다고 분석하고 있으나,신한지주에서는 "소설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신한지주는 이날 김 전 장관 등 4명을 사외이사로 새로 선임했다. 이로써 신한지주 이사회는 사외이사 8명과 라 회장,신상훈 신한지주 사장,이백순 신한은행장,류시열 비상임이사 등 12명으로 구성됐다.

◆라응찬-신상훈 체제 영향 없을 듯

신한금융 직원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10명 중 9명은 "라 회장"이라고 답한다. 그만큼 라 회장에 대한 직원들의 신뢰는 절대적이다. 1991년부터 8년간 신한은행장을,2001년부터 9년간 신한지주 회장을 지내면서 형성된 그의 카리스마도 엄청나다. 2005년 '최영휘 당시 신한지주 사장 경질사건'을 거치고 나서는 그의 카리스마에 감히 도전할 마음조차 먹는 사람이 없다. 신한지주는 현재 '라 회장-신상훈 사장'이라는 확실한 지배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사회 의장이 분리됨에 따라 과연 '라 회장-신 사장 체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을 끌고 있다. 이에 대해 금융계에서는 이사회의 경영진 견제 기능이 강화되겠지만 별 영향은 없을 것이란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사회 의장은 이사회를 대표하고 회의를 주관하며 전반적인 이사회 업무를 진행하는 권한을 갖고 있다. 신한금융그룹이 지금처럼 순항할 경우 이사회 의장이 '힘'을 과시할 이유가 없다. 라 회장-신 사장 체제가 주주와 직원들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는 데다 경영 방식도 합리적이어서 마찰을 빚을 여지도 적어 보인다.

그렇지만 사외이사들과 경영진이 이견을 빚는 사안이 닥치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다. 경영진이 아무리 이사회 의결을 요구해도 소집권을 가진 의장이 버티면 결정은 지연될 수밖에 없다. 이사회 사회권을 가진 의장이 분위기를 경영진과 반대쪽으로 몰아가면 안건이 통과된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이에 대해 전 교수는 "도와줄 건 도와주고 견제할 건 견제하겠다"고 말했다.

1997년부터 최근까지 사외이사를 지낸 남대우 전 SK에너지 사외이사는 "이사회 의장이 분리된 것은 상징적 의미일 뿐 결국은 운용의 문제"라며 "경영진이 사외이사를 진정한 파트너로 인정하고 사외이사들도 견제 기능에 충실하면 문제는 최소화되고 효과가 극대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26일 주주총회와 이사회를 여는 하나금융도 회장(CEO)과 이사회 의장을 분리할 방침이다. 그렇지만 민영화를 앞두고 있는 우리금융은 현행처럼 이팔성 회장이 이사회 의장을 겸할 계획이다.

경제부금융팀장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