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에서 일하는 서지영 대리(31)는 지난해 12월부터 커피 음료 '산타페'를 박스째 사들이기 시작했다. 산타페를 생산하는 한국야쿠르트가 아이돌그룹 2PM의 팬미팅 티켓을 지급하는 이벤트를 열었던 것이다. 커피캔 밑에 적힌 행운번호를 홈페이지에 입력하면 일정 점수가 쌓이고 누적 점수가 높은 순으로 행운을 얻는 행사였다. 2PM의 열혈팬인 그는 카페인 거부반응이 있어 커피를 마시지 못하지만 괘념치 않았다.

서 대리가 두 달 동안 구입한 캔은 총 11박스.박스당 175㎖짜리 커피캔 30개가 들어 있으니 그의 자취방에 쌓인 캔커피는 줄잡아 330여개에 달했다. "아무리 커피를 사들여도 점수가 상위권이 안 되더라고요. 결국은 팬미팅 하루 전에 인터넷 카페에서 티켓을 5만원에 구했습니다. 남은 캔커피를 처리하느라 많이 힘들었죠."

그는 지난달 열린 팬미팅에서 멤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동영상으로 촬영하고 근거리 렌즈로 사진도 찍었다. 촬영분을 편집하고 사진을 모두 포토샵으로 보정한 다음,평소 활발하게 활동하는 인터넷 팬카페에 올렸다. 서 대리가 찍은 사진과 동영상은 주요 포털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그는 회사에서 일 잘하고 야무진 이미지로 통한다.



◆"아이돌 가수 위해 한약도 지었죠"

"(아이돌 가수는)아낌없이 내리사랑을 주게 되는 동생같은 존재죠.과도한 스케줄 때문에 얼굴이 핼쑥해진 걸 보면 마음이 아파요. "

프리랜서 디자이너 황수미씨(30)의 '팬질' 역사는 1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하던 때부터 시작됐죠.고등학교 1학년 무렵엔 HOT의 콘서트에서 흰색 풍선을 흔들었고요,몇 년 전부터는 동반신기를 좋아하고 있어요. "

황씨는 한때 사생팬(私生fan,연예인 사생활을 좇는 팬)을 자처하며 좋아하는 가수의 숙소 앞에서 밤을 새울 정도로 극성맞았지만 20대 중반 이후부터 수위를 조절하고 있다. "제가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 얼굴이 상했다 싶으면 한의원에 가서 보약을 지어 보냅니다. 그 가수로 인해 제 삶이 행복해진다면 전 만족해요. "



◆찌든 일생 벗어난 취미생활

미혼 여성의 삶은 고달프다. 직장에선 위에서 누르는 선배와 치고 올라오는 후배 사이에 낀 신세고,인간관계는 어찌나 어려운지.회사에 뼈를 묻겠다고 결심하기엔 '유리천장'이 단단하고,'언제 시집가니' 하는 잔소리의 융단폭격을 맞다 보면 스트레스가 쌓여간다. 찌든 일상에서 벗어나 재충전을 하기엔 취미생활만한 게 없다.

결혼정보업체 듀오에 다니는 양민희 주임(31)은 주말마다 반나절 이상 프라모델 '건담' 조립에 몰두한다. 5만원가량의 조립식 키트를 구입해 칼 니퍼 등의 공구를 사용해 건담 로봇을 완성한다. 8시간가량 걸리는데,완성된 건담을 보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손재주가 있었던 양 주임은 인터넷을 보고 혼자 공부해 석 달 전부터 건담에 빠져들었다.

기자 조수영씨(31)는 1주일에 한 번꼴로 가야금을 뜯으러 모교에 간다. 학교 연습실에서 음대생의 악기를 빌려 배운 지 1년이 넘었다. 조씨는 "일하면서 스트레스가 많고 공허함까지 느꼈는데 허전한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 취미생활을 찾았다"며 "가야금의 청아한 음색에 매료됐고 우리 음악에 대한 관심까지 생기게 됐다"고 말했다. 1000만원에 육박하는 악기는 살 엄두가 나지 않는단다.



◆역시 땀 흘리는 것이 제맛

금강오길비에 다니는 박주하 부장(39)은 2년 전 큰 결심을 했다. 정보기술(IT) 벤처분야 지인들과 친목모임을 만들었는데,그게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매번 모일 때마다 술을 들이켰고,다음 날 숙취로 고생하며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든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지인들을 설득해 생산적인 일을 하자고 제안했다. 이들의 선택은 등산.

지리산을 시작으로 태백산 명성산 공작산 등을 다니며 전국을 누비고 있다. 이젠 한 주라도 등산을 거르면 몸이 근질근질할 정도다. "주말에 등산을 가면 내가 한 주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느껴져요. 많이 힘들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거고요,그러면서 반성이 되죠."

유니베라에 근무하는 성봉해씨(30)는 19년 전부터 말을 타고 있다. 용인 마장에 있는 5살 된 '미스터빅'이라는 수말이 그의 애마다. 주말마다 승마를 하러 가는데 50분에 5만원 선."승마가 생각보다 운동이 많이 돼요. 다이어트에 좋고 장 운동도 돼 변비가 없어졌어요. " 일년에 수차례 승마대회에 나가며 수상 경력도 꽤 된다. 살아있는 생물과 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정서적 교감이 중요하다. 미스터빅에게 당근을 주면 그르렁 소리를 내며 좋아하는데 아주 귀엽다고.



◆취미로 시작해 이젠 전문가 수준

광고업계 종사하는 이수지 과장(36)은 '팔방미인'으로 통한다. 텃밭 가꾸기,가구 제작,옷 만들기,요리,재테크 등 취미생활은 대여섯개에 달하며 이제 전문가 뺨치는 실력을 자랑한다. 책상과 책장,의자 등 가구의 30% 이상을 직접 만들었으며 아파트 1층 앞에 있는 12평 텃밭에서 기르는 유기농 작물은 30여종에 이른다.

아토피 질환이 있는 조카를 위해 시작한 옷 만들기는 이제 원피스 정도는 5시간 안에 끝낼 수 있다. 이 과장은 "재테크도 엄연한 취미생활"이라며 "싱글 여성이 당당하게 살기 위해선 재테크 지식은 기본으로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직장생활 10년차인 이 과장은 신도시에 30평대와 10평대 아파트 두 채를 마련했다.



◆백화점에선 "골드미스 잡아라"

싱글 여성이 '큰손'으로 떠오르고 있는 곳은 백화점 문화센터.신세계백화점의 봄학기(3~5월) 미용강좌의 미혼 여성 비율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8% 증가했다. 학고재 갤러리,리움미술관 등을 방문해 전문 큐레이터의 설명을 듣는 '갤러리 투어'나,명화를 감상하며 역사와 작가에 대해 배우는 '알면 보이는 현대미술' 강좌 등의 수강생들은 미혼 여성이 대부분이다.

현대백화점 요리강좌의 경우 대체로 영양간식,한방건강요리 등 가족을 위한 강좌가 인기 있는 반면 미혼 여성은 이탈리아요리,커피,제과제빵 등을 선호하고 있다. 이 밖에도 싱글들은 리듬체조와 발레 등의 무용,클라리넷과 플룻 등 악기 연주,동양자수 같은 공예,미술강좌 등에 관심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AK플라자 수원점은 최근 처음으로 '비즈니스&사교를 위한 타로카드' 강좌를 시작했다. 토요일 오전에 진행되는 이 수업은 타로카드의 유래와 해석법 등을 배우는데 수강생의 80%가 미혼 여성 직장인이다. 추가 문의가 빗발치자 백화점 측은 다음 달 강좌를 추가할 예정이다.

김정은 기자 likesmi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