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런던 소더비경매장에서 스위스 조각가 자코메티의 청동 조각상‘걸어가는 사람 1’이 수수료 포함하여 약 1200억 원에 낙찰되었다.
소더비의 예상가를 몇 배 초과하는 금액으로 낙찰되어 관계자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희귀 미술품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올라감으로 높은 가격에도 거래가 된다.
서화나 골동품 같은 미술품 구입은 부자들의 취미나 투자수단으로 많이 이용된다.
부자들이 미술품을 좋아한다고 해서 전 재산으로 미술품을 사지는 않는다.
그러나 1930년대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10만석 전 재산 모두를 서화, 골동품 등과 같은 문화재와 바꾼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10만석을 상속받은 갑부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이다.
1900년대 종로 상권을 잡고 있던 갑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젊은 나이에 고양군, 양주군, 광주군일대의 10만석의 토지를 상속받은 그는 물려받은 재산을 지키거나 더 크게 불릴 생각은 아니하고 가진 재산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없을 까 고민하였다.

“어떻게 하면 이 많은 재산을 가치 있게 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재산을 우리 민족을 위해 쓸 수 있을까?”

그는 3 ‧ 1 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며, 당대 최고의 감식안이자 전서(篆書)와 예서(隸書)에 뛰어난 서예의 대가였던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선생의 조언을 받았다.
오세창 선생은 간송에게 문화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침을 주었다.

“인간과 짐승을 가장 두드러지게 구분해 주는 것은 문화라는 것이다. 한 나라의 문화재란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주체성과 정신적 가치가 깃든 일종의 유산이지. 즉 우리 문화재는 우리 민족의 정신이 함축된 유산이란 말일세. 우리 문화재를 지키는 일은 그 일에 생애를 바치겠다는 굳건한 뜻이 있어야만 가능하네.”

간송은 오세창선생에게 직접 글씨와 서화를 배워 문화재에 대한 안목을 익히고,
그의 권유를 받아들여 문화재를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다.
간송은 ‘한남서림’이라는 인사동 고서점을 인수하여 서화와 골동품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희귀한 물건은 기와집 수십 채의 가격이라도 서슴지 아니하고 지불하였고, 진귀한 물건은 가격을 묻지도 않고 알아서 합당한 가격을 지불하여 우리 문화재가 일본인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노력했다. 문화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간송은 1938년 그동안 수집한 문화재를 정리하여 ‘보화각(葆華閣)’이라는 사립 박물관을 만들었다. 지금 간송미술관의 전신이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물려받은 10만 석 재산은 사라지고 문화재만 남았다. 그러나 그가 수집한 문화재는 그 가격을 따질 수 없는 귀중한 물건이다.

간송은 국권이 피탈당한 암울했던 시절에 물려받은 재산을 지키며 부자로 살기를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 재산을 모두 문화재와 바꾸고 그 문화재를 지켰다.
독립투사의 애국심에 비길 만큼 민족문화와 문화재 수집에 온 정열을 쏟았다.
간송이 일본인에게서 문화재를 전부 지킬 수는 없었지만, 그의 열정으로 이만큼이라도 귀중한 문화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큰 부자는 하늘이 낸다고 했다. 하늘이 낸 부자이기에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이다. 아마 간송은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재산을 준 하늘에 감사하게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부자의 도덕적 의무를 이야기 할 만큼 사회가 안정적이지 않았지만 선각자로서 한 시대를 앞서 간 사람이었다.
간송은 개인적 치부가 아닌, 가치 있는 일에 재산을 사용하는 것이 노블레스 오블리주,
즉 부자의 진정한 소임이라고 깨달은 사람으로 가히 존경받을 만한 부자였다.
(hooam.com / whoi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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