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代를 잇는 家嶪] (82) 삼해상사 ‥1982년 국내첫 조미김 생산…수출 20% 차지 '김名家' 로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1968년 을지로서 건어물 도매 시작…철저한 신용관리로 사업 승승장구
日기술 들여와 한국형 조미김 '히트', 대형 식품업체들과 경쟁하며 고전
소품종 다량생산…틈새공략 성공
日기술 들여와 한국형 조미김 '히트', 대형 식품업체들과 경쟁하며 고전
소품종 다량생산…틈새공략 성공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 하늘이 내린 영양의 보고가 바로 김이다. 바닷물과 햇빛이 빚어놓은 김에는 비타민C가 귤의 3배,비타민A와 비타민B군이 일반 야채의 10배 가깝게 들어있다. 김은 단체급식의 단골 메뉴요,싱글족에게는 라면 김치 햇반 등과 함께 한 끼를 가볍게 때우는 데 필수적인 먹거리.인삼 김치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이 수출되는 식품으로 정부가 지정한 '세계일류상품'의 하나다.
김을 판매하고 조미김을 생산하는 삼해상사는 국내 430여개 김 관련 업체 중 수출 실적 1위 기업이다. 우리나라 김 수출의 20% 안팎을 담당한다. 방대한 유통망과 자금력을 배경으로 식품시장을 쥐락펴락하는 대형 종합식품회사들의 등쌀에도 순항 중인 중견식품 업체다.
창업자인 김광중 회장(75)은 법대를 졸업한 뒤 1년간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나 판 · 검사 못지않게 거상(巨商)이 되는 것도 보람이 클 것이란 아버지의 권유에 사시 준비를 접고 장사의 길로 뛰어들었다. 사훈인 '유통보국'에 이 같은 생각이 담겨 있다. 그는 1961년 선친의 친구가 경영하는 삼덕물산에 들어갔다. 비료 시멘트 원목 등을 수입하고 김 오징어 멸치 등 건어물을 수출하는 무역상사였다.
입사한 뒤 8년간 건어물 수매가 이뤄지는 곳이라면 안 가본 어항이 없었다. 서해로는 서천 고창 영광,남해로는 신안 완도 고흥부터 통영 김해까지,동해로는 거진 대진 구룡포는 물론 울릉도까지 좋은 물건을 찾아 다녔다. 건어물의 유통경로를 꿰뚫고 막강한 인맥을 쌓았던 소중한 시기였다.
사업에 자신이 붙자 1968년 말 독립을 선언했다. 퇴직금과 저축한 돈으로 서울 을지로 5가 중부시장에 삼해상사를 열고 건어물 도매업을 시작했다. 개업 첫날 경북 울진에서 오징어 한 트럭이 실려 왔다. 그의 성실성을 눈여겨본 거래선이 사전에 기별도 하지 않고 보내온 마수걸이였다. 본래 농축수산물 장사에 성공하려면 주산지 출신이든지,오랜 세월 시장에서 경험을 쌓은 터줏대감이어야 하는데 김 회장은 그렇지 못했다. 이런 약점을 철석 같은 신용과 빠른 자금 회전으로 극복하고 거래선의 신망을 얻으면서 시장을 장악해 나갔다.
그는 시장통에서는 처음으로 일본제 중고 금고를 사다가 4층 사무실에 보란듯이 비치했다. 당시 상인들이 나무궤짝이나 전대에 돈을 보관한 것에 비하면 그 자체가 신뢰를 주기에 충분했다. 거래선들은 은행 대신 이 금고에 돈을 맡겨두기 시작했다. 아침에 올라온 건어물의 판매 대금은 당일 지급했다. 다른 도매상은 보통 외상으로 물건을 팔아 다음 날이나 며칠 후 판매대금을 회수한 다음에야 생산자에게 결제했지만 김 회장은 미리 돈을 빌려다 물건이 들어온 날에 줬다. 이 덕분에 거래선은 다음 날 아침 또다른 물건을 가지고 상경할 수 있어 자금회전율이 빨랐다. 당연히 삼해상사에는 질 좋고 값싼 물건이 밀려들었다. 그는 시장통에서 유일한 대졸자답게 복식회계와 대차대조표를 도입해 돈의 입출을 물샐틈 없이 관리했다. 사업은 날로 번창해 1975년에는 을지로1가 세무서에서 가장 세금을 많이 내는 점포가 됐다.
1982년 삼해상사는 조미김 생산에 뛰어들었다. 1980년대 들어 가정부를 두는 집이 점차 사라지고 주부들이 편리함을 추구하는 흐름을 간파하고 결정한 신사업이었다. 경기도 안성에 조미김 업체인 삼해김을 설립하고 일본의 제조기계와 공법을 들여왔다. 조미김은 일본에서 품질이 떨어지는 김의 풍미를 올리기 위해 조미액을 발라 구운 데서 출발한 상품이다. 느끼한 맛을 주는 일본식 조미액은 한국인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이에 따라 들기름을 발라 맛소금을 뿌리는 한국식 조미김을 내놨다.
그러나 시장은 여전히 무반응이었다. 당시엔 김 굽는 일을 공장에 맡기는 게 주부로서의 역할을 포기한 것이라는 통념이 강했기 때문.거액을 투자한 공장이 멈춰서자 보다 못한 김 회장은 직원들과 함께 대형백화점과 초등학교 앞에서 조미김을 무료로 배포했다. 며칠이 지나자 도시락 반찬으로 조미김이 그만이라는 반응에 힘입어 백화점과 학부모들로부터 전화가 쇄도했다. 안성공장을 24시간 풀가동해도 모자라 이듬해 라인을 2개 더 증설했고 1984년에는 전북 익산에서 빈 공장을 인수해 조미김을 생산했다.
조미김이 폭발적 인기를 얻자 1984년부터 미원 해표 오뚜기 해태 동원 등 대형 식품회사들도 제품을 내고 경쟁에 뛰어들었다. 대형사들이 납품가를 떨어뜨리고 거대한 유통망과 다양한 제품구색을 활용해 삼해김을 밀어내자 중소기업인 삼해상사로서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결국 원양어업 업체인 사조에 조미김 생산시설을 넘기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마른 김의 국내 유통과 수출에만 주력했다.
성장 정체에 고민하던 차에 기회가 찾아왔다. 백화점이나 슈퍼마켓들이 상대적으로 질 떨어지는 제품을 고가에 밀어내는 대형 식품회사에 불만을 표출한 것이다. 이에 용기를 얻어 1992년 조미김 시장에 재진출했다. 라면수프에 들어가는 김부터 백화점용 PB(자체브랜드)상품,고급형 단체급식용까지 고객이 주문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만들었다. 소품종 다량생산 방식으로 틈새시장을 파고 들었다. 현재까지 내놓은 조미김 제품은 120여종이나 된다.
김 회장은 일찌감치 장기 계획에 따라 가업 승계를 준비했다. "나이를 먹으면 총명함을 잃고 결국 사기꾼에게 돈을 떼이고 만다"는 평소 생각에 따른 것이다. 그는 장남인 김덕술 사장(47)에게 일본어를 전공시켰고 며느리도 일본어 교사 가운데서 낙점했다. 김 선진국인 일본과 교역하기 위해서는 언어 소통이 필수적이기 때문.김 사장은 대학 시절 겨울방학마다 김 판매 지원을 위해 백화점 가두진열대에 섰다. 2학년 여름방학에는 일본에서 조미김 기계 조립방법과 생산기법을 배웠다. 1987년 제대하자마자 삼해상사에 입사하고 결혼했다. 안정된 가정을 꾸려야 사업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인 것이다. 김 회장은 또 1985년부터 3년간 회사 대표자리에서 일시적으로 물러나 장남이 전문경영인으로부터 경영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김 사장은 입사 이후 5년간 매일 새벽 5시에 서울 가락동시장 내 중부건해산물에 출근하며 영업을 배웠다. 1992년 조미김 사업을 재개하면서 틈새시장에 납품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 닦은 경험과 네트워크 덕분이다.
제품개발에도 직접 나서 크고 작은 성공을 거뒀다. 예컨대 11월 초에 나오는 햇 초사리김으로 만든 조리김은 다른 제품의 4배에 달하는 가격을 받고 있다. 대만 태국 싱가포르에 수출길을 열고,대미 수출량을 대폭 확대시킨 것도 그의 성과다. 이런 노력 끝에 입사 후 18년 만인 2005년, 사장에 오르게 됐다.
김 사장은 "농수산품 업계에서는 아버지 나이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분은 거의 없다"며 "그만큼 아버지는 일찍이 성공적인 은퇴를 준비했고 업계에서도 이에 대해 높게 평가한다"고 말했다.
그는 "부동산 투자나 주식상장 등으로 쉽게 돈을 벌 수 있지만 본업을 버리면 결코 기업이 100년 이상 영속할 수 없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김 사업에만 충실할 것"이라며 "딸 셋 중 가장 적극적이고 능력 있는 아이에게 가업을 물려주려 한다"고 덧붙였다.
정종호 기자 rumb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