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승복을 입은 스님들이 합장한 채 허리를 굽혀 성체(聖體)를 향해 정성껏 절을 올린다. 아기천사처럼 햐안 옷을 입고 빨간색 고깔모자를 쓴 채 찬송가를 부르던 꼬마들이 신기한 듯 스님들을 쳐다본다. 지난해 12월24일 저녁 충북 옥천군의 옥천성당에서 열린 성탄전야 미사 풍경이다.

이날 미사에는 옥천 대성사 주지 혜철 스님과 대성사 신도회장단,인근 보은에서 온 이근태(학림교회) · 배영도(관기교회) · 성낙현(갈평교회) 목사와 청주 삶터교회 김태종 목사,가정교회(통일교) 김진구 목사,혜전(청원 석문사) · 보덕(견불사) 스님,박영순 청주향교 전교 등 이웃 종교인들이 자리를 함께 해 아기예수 탄생을 축하했다.

옥천성당의 다종교 합동미사는 벌써 5년째였다. 이들은 왜 남의 종교 잔치에 찾아가 축하했을까. 혜철 스님은 "예수님이나 부처님이나 똑같은 성인이신데 내 종교,남의 종교 가리며 구애받을 필요가 있겠느냐"며 "부처님오신날에는 옥천성당 신부님이 우리 절에 오셔서 30분 동안 법문도 해주셨다"고 설명했다. 종교 간의 벽은 마음에 있을 뿐,마음을 트고 나니 통하지 않을 일이 없다는 얘기다.

옥천 지역 종교인들의 이 같은 장벽 허물기는 청주로 이어졌다. 옥천성당 주임신부로 4년 동안 일하면서 불교는 물론 개신교,원불교 등 이웃 종교인들과 친하게 지냈던 곽동철 신부가 2년 전 청주 수동성당으로 옮겨가면서였다. 곽 신부가 10분 거리에 있는 관음사 현진 스님에게 부활절 계란을 선물하자 현진 스님은 부처님오신날 떡을 보냈고,마침내 작은 모임으로 발전했다. 지난달(12월) 1일 관음사에서 첫 모임을 가진 '충북 종교인 사랑방'이다.

종교인사랑방 회원은 곽 신부와 현진 · 혜철 스님,배영도 · 김태종 · 성낙현 · 이근태 · 최현성 · 김진구 목사,조순형 전도사(청주 노동교회),원불교 박신유 교무(청주 상당교당) 등 10명.회장인 '방주'는 1944년생으로 연장자인 곽 신부가 맡았고,궂은 일이 많은 총무 격의 '마당쇠'는 김태종 목사에게 맡겼다.

개별적으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부활절 · 성탄절 · 부처님오신날 등에 서로 왕래하며 교류해온 이들은 2008년 6월부터 두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만나 신뢰를 쌓아왔다. 곽 신부는 "종교가 다른 성직자들이 모이면 말이 잘 통하지 않을 것 같지만 종교를 떠나 순수한 인간으로 만나니까 못할 얘기가 없다"고 했다.

처음엔 서로 조심스러워 종교와 무관한 일상사와 사회문제 등에 대해 주로 이야기했던 이들은 이제 서로의 종교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묻거나 민감한 문제에 대해 의견도 나눈다. 인간적인 신뢰가 쌓인 결과다. 결혼한 목사들이 신부와 스님에게 "얼마나 못났으면 장가도 못가셨겠느냐?" "신부님은 언제 신랑을 데려오나요?"라고 농담도 던질 정도다.

이들은 다음 달 모임에서 종교인사랑방을 정식으로 출범시키는 한편 서로 뜻을 모아 할 수 있는 나눔과 봉사 등의 구체적인 실천 방안도 모색할 예정.종교가 다른 이들을 한데 묶는 고리는 바로 사랑과 자비다. 곽 신부는 "우리가 서로 다른 종교를 선택해 입은 옷과 가는 길이 다를 뿐 사랑과 자비는 같은 것 아니냐"며 "교회 안에만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건 아집이며 독선"이라고 말했다.

또 지난 성탄절에 수동성당을 방문해 축하인사를 전했던 현진 스님은 "신부님이 법당에 오시고,스님이 성당이나 교회에 가는 것 자체가 신선해서 신자들도 매우 좋아한다"며 "올해 부처님오신날에는 수동성당 성가대가 우리 절에 와서 축가를 불러주셨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종교인 교류를 신자들 교류로 확대하겠다는 얘기다. 현진 스님은 "종교라는 옷을 벗고 서로 인간으로 대하면 통하지 않을 것이 없다"며 "대화하지 않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