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브랜드를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해선 한국의 전통과 문화를 해외에 체계적으로 알리는 노력도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해외에 설치된 한국문화원은 독일 중국 일본 미국 캐나다 등 고작 12곳뿐이다. 해외 110개국에 문화원을 운영하고 있는 영국과는 천양지차(天壤之差)다. 장병우 전 LG오티스 사장이 최근 롤란드 데이비스 영국문화원장을 만나 한국의 국가품격을 주제로 얘기를 나눴다.

▲장병우 전 사장=작년 8월 말 한국에 부임했다고 들었는데 첫 인상은 어땠습니까. 제가 아는 미국인 친구는 인천공항에 내리자마자 김치냄새가 진동했다고 하더군요.

▲데이비스 원장=전 김치의 빅팬(big fan)입니다. 원장으로 부임하기 전 2002년과 2003년,2005년에 한국을 방문했었죠.올 때마다 서울이 참 많이 발전한다는 걸 느낍니다. 2002년엔 고층빌딩과 사무실만 빽빽히 들어섰을 뿐,별다른 특징이 없었는데 다시 와보니 많은 게 바뀐 것 같아요.

광화문 광장 등 도시의 고유한 색깔이 강해졌습니다. 청계천도 훌륭하고요. 변함없는 것은 늘 바쁜 사람들입니다. 한국인들은 항상 속도(speed)와 빠른 템포를 강조합니다. 여러 단계의 결재를 받고 일처리도 느린 우리와 비교하면 한국 사람들의 일처리 속도는 상당히 놀랍습니다.

▲장 전 사장=런던의 랜드마크로 자리잡은 한 빌딩은 완공하기까지 100년이 걸렸다고 하는데,나를 포함한 한국사람들은 빌딩 하나를 짓는 데 100년이나 걸린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데이비스 원장=양면성이 있다고 봅니다. 상황에 따라 어떤 성격이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어요. 다이내믹(dynamic)하다는 한국의 특징도 마찬가지죠.일을 빠르게 처리하는 건 큰 장점이고 고속성장을 이룬 원동력이 됐다고 봅니다. 하지만 빠르다는 것만이 능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한국의 영어 배우기 열풍을 예로 들어보죠.한국사람들은 너무 많은 돈과 자원을 영어에 쏟아붓고 있습니다. 개인교습도 받고 각종 교재와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기도 하죠.결과를 빨리 얻어내려는 한국 사람들의 특징이 반영된 것 같아요. 그러나 언어는 시간을 들여 기초부터 차분히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빨리빨리' 정신이 통하지 않는 곳도 있거든요.

▲장 전 사장=한국 사회가 어떤 걸 고쳐나가면 좋겠습니까.

▲데이비스 원장=한국의 교육제도가 많은 면에서 성과를 내고 있지만 교육열이 지나치게 높은 것 같아요. 러닝머신을 뛰는 것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아이들의 감성을 개발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교육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우려가 사회 전체적으로 퍼져 있다는 것이죠.

물론 한국이 빠르게 경제 발전을 이뤘고 각종 하이테크 산업을 발전시켰지만 서비스와 지식,창의성이 중시되는 미래 환경에선 지금의 교육시스템이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장 전 사장=외국인 입장에서 한국인들의 응대방식에 문제점은 없나요.

▲데이비스 원장=외국인에 대한 태도를 좀 바꿔야 한다고 봅니다. 가끔 외국인에게 편견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때면 아주 실망스러워요. 개인적으로 당황스러웠던 적도 많습니다. 얼마 전 애플사의 아이폰을 사려고 매장에 가서 '얼마냐'고 물었더니 점원이 아주 적대적인 태도로 '노 포리너스(No foreigners)'라고 하더군요. '왜 안되느냐'고 다시 물었더니 단지 외국인이니까 안된다는 것이에요.

▲장 전 사장=역사 얘기를 좀 해보죠.한국은 100년 전 일본에 강제 합병당한 비운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36년간 식민 지배도 받았죠.하지만 지금은 2차 대전 이후 독립한 수많은 신흥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경제적으로 성공했다는 평가를 듣습니다. 그 원동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데이비스 원장=역동성과 자주성 아닐까요. 한국은 일본에 점령당했던 불행한 역사가 있지만 그 경험을 통해 일본과의 경쟁에서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것 같습니다. 역설적으로 식민지배 경험이 발전에 자극이 된 것이죠.한 가지 더 꼽자면 '자기 희생'입니다 한국사람들은 자신보다 직장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하는 것 같습니다.

▲장 전 사장=경제적 역량에 비해 정치 수준이 많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많습니다.

▲데이비스 원장=영국도 투표에 의해 선출되지 않는 상원제도가 남아있으므로 정치발전 측면에서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을 받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민주정치의 역사가 길어 한국과 차이가 납니다. 한국도 언론의 감시와 시민들의 정치참여가 활발해지고 있는 만큼 시간이 흐르면 나아질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정치인 수준이 국민 기대에 못 미친다고 생각하는 건 영국도 마찬가지죠(웃음).

▲장 전 사장=한국에선 G20정상회의 개최를 계기로 국가의 품격,브랜드 파워를 높여야한다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국격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G20정상회의 개최가 한국의 국격을 높일 기회가 될까요.

▲데이비스 원장=한국이 세계무대에서 그 역할을 넓혀가고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G20회의와 같은 이벤트를 여는 것은 긍정적인 인상을 줄 겁니다. G20의장국이라는 기회를 잡은 한국은 이 회의가 한국 땅에서 열린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합니다.

국격과 관련해서는 최근 책에서 본 한 가지 예를 들어보죠.이란 사업가와 스웨덴 사업가가 해외에서 어떤 사업을 따내기 위해 경쟁을 합니다. 그런데 누구나 스웨덴 사업가가 계약을 따낼 것이라고 생각하죠.그건 사업가 역량의 문제가 아니라 스웨덴이 세계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투명한 사회라는 걸 세상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의 격(格)은 그 나라 사람들이 어디에 가든지 돋보이게 만듭니다.

▲장 전 사장=삼성,현대자동차,LG와 같은 한국 기업들의 브랜드 파워가 국가보다 높습니다.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데이비스 원장=기업의 브랜드가치를 올리는 일은 국가 브랜드를 높이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기업 이미지는 제품과 로고 제작,출판 등을 통해서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국가 이미지를 관리하는 것은 정부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국민 기업 정부 등 나라의 구성원 모두가 노력해야 합니다.

▲장 전 사장=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이미지를 높이려면 어떤 게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데이비스 원장=문화적인 교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기 위해선 조직적인 시스템을 갖춰야 합니다. 영국문화원은 75년째 세계 110개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문화원을 통해 다른 나라에 문화를 전파하는 건 그 나라에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결국 영국에도 도움이 됩니다.

▲장 전 사장=문화의 전파라는 측면에서 일본을 벤치마킹할 수 있다고 봅니까.

▲데이비스 원장=일본 문화는 정부와 기업들의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 퍼진 게 아닙니다. 오히려 일본의 문화가 가진 개성과 일본 제품의 아이디어 · 디자인이 외국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했기 때문입니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의 하이테크 제품들이 세계로 퍼져나가서 외국사람들에게 익숙해진다면 문화 전파도 함께 이뤄질 겁니다. 물론 정부의 노력이 수반되면 더 좋겠죠.

▲장 전 사장=화제를 약간 바꿔볼까요. 요즘 아시아는 하나라는 개념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중국 일본 한국 등이 어느 단계까지 통합될 것으로 봅니까.

▲데이비스 원장=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아시아 지역 내 중국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질 것입니다. 이것이 서로 대등한 수준의 국가들이 모여 있는 유럽과 다른 점입니다. 한국과 일본은 정치적,경제적으로 비슷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자유무역도 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중국은 너무 다르기 때문에 아시아의 통합이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장 전 사장=남북한 통일 문제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한국인에게 통일은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줍니다. 한 차원 높은 도약을 위한 기회라는 시각도 있고,경제적 사회적 부담이 너무 클 것이란 걱정도 적지 않습니다.

▲데이비스 원장=독일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통일비용은 엄청나게 많이 들 겁니다. 많은 한국인이 경제적 번영을 희생해야 할 것이고,그런 상황을 참지 못하는 이들도 생겨날 수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분열이 심해질 수 있다는 것이죠.중국의 입장도 무시하기 어려울 겁니다. 통일은 아주 어려운 과정이 될 것입니다.

정리=강현우 기자 hkang@hankyung.com

사진=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