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애틀의 보잉사가 2007년 말 차세대 주력 여객기로 개발한 '보잉787 드림라이너'.객석 수가 330석에 달하는 이 대형 여객기가 처음 공개됐을 때 일본 언론들은 '보잉 787은 반(半) 일본제'라는 헤드라인을 달았다.

일본 최대 소재기업인 도레이가 보잉787의 동체를 만드는데 사용된 탄소섬유를 독점 공급했다는 사실을 부각시킨 것이었다. 보잉787은 1500장 이상의 대형 알루미늄 판을 리벳(막대모양 못)으로 이어붙이는 기존 항공기와 동체 제작 방식이 다르다. 슈퍼섬유의 일종인 탄소섬유로 우선 비행기 틀을 만든 뒤 도자기를 굽듯 거대한 가마에 굽는 방식이다. 이음매가 없고,동체나 리벳의 부식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알루미늄 동체보다 4분의 1 이상 가벼워 평균 운항거리도 1만6000㎞까지 늘어났다. 보잉787이 '꿈의 항공기'라고 불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도레이는 보잉사에 탄소섬유를 공급하면서 미쓰비시 · 후지 · 가와사키중공업 등 일본 3개 중공업 회사가 보잉787 동체 제작에 참여할 수 있는 길도 함께 열었다. 보잉은 도레이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전 세계 항공사들 사이에서 인도 경쟁이 치열한 보잉787 1호기를 내년 말 일본 항공사인 전일본항공(ANA)에 넘기기로 했다.

◆도레이,소재부문 매출이 60% 이상

도레이의 사례는 슈퍼 · 나노 · 스마트 · 친환경 섬유 등 신섬유 소재 산업이 국가 산업경쟁력 강화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1970년대까지 화학섬유가 주력이었던 도레이는 일찌감치 자동차 항공 등 다양한 산업분야에 적용할 수 있는 신섬유 분야에 눈을 돌려 첨단 소재기업으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했다.

도레이의 변신을 자극한 건 한국이었다. 1960년대 말부터 한국 대만 등 경쟁국의 화섬산업이 급격히 성장하면서 위기감을 느낀 도레이는 1971년 탄소섬유 개발에 착수했다. 철보다 가벼우면서도 강도는 더 높은 탄소섬유가 미래 항공기와 로켓의 핵심부품 소재로 널리 쓰일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일본에 항공기 시장이라곤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절이었다.

1970년대 중반 상업생산을 시작했지만 시장은 금세 커지지 않았다. 도레이는 낚싯대 골프채 등 레저용품부터 시장을 개척해나갔다. 그렇게 쌓은 기술로 1982년 처음으로 보잉757 부품과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의 동체 일부에 납품을 시작했다. 1990년대 들어 탄소섬유 적용 분야가 확대되면서 도레이의 소재사업도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도레이는 연간 20조원으로 추정되는 세계 탄소섬유 시장에서 30%대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하며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작년 기준으로 전체 매출(1조6495억엔) 중 60% 이상이 탄소섬유 등 소재 부문에서 나오고 있다.

도레이가 2004년 발표한 새 경영비전 '뉴 도레이 21'에는 탄소섬유가 여전히 신사업 부문으로 분류돼 있다. 개발한 지 30년이 지났어도 탄소섬유의 시장 성장 가능성은 무한하다는 생각에서다.

◆나노 · 스마트섬유 부각

다른 글로벌 섬유기업들도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폴리에스터 등 범용 섬유 생산만으로는 지속적인 성장을 담보할 수 없다는 절박감이 앞다퉈 신섬유 투자를 향해 달려가게 하고 있다. 도레이의 경쟁 업체인 일본 2위 화섬기업 데이진도 1970년대 초반부터 슈퍼섬유인 아라미드를 개발,미국 듀폰과 함께 5조원에 달하는 글로벌 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아라미드섬유는 철강보다 인장강도가 최고 10배 이상 높고 내열성이 강화된 신소재로 우주복 방탄복 등에 쓰인다. 나일론을 처음 개발한 듀폰은 아라미드에 이어 최근 식물성 원료 소재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그동안 기술개발 속도가 더뎠던 나노섬유와 스마트섬유 시장도 글로벌 기업들의 공략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 도널드슨은 작년 기존 테프론 필름을 섬유 원단에 코팅한 나노섬유 '테트라텍스'를 개발했다. 테프론 필름은 전세계 필터 시장의 25%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공업용 소재다. 테트라텍스는 ㎡당 수억개의 미세한 구멍이 뚫려있어 몸에서 발생하는 땀을 빠르게 배출시킨다.

도레이 도요보 미쓰비시화학 등 그동안 탄소섬유 개발에 투자를 집중했던 일본 기업들도 3~4년 전부터 나노섬유 개발에 본격 뛰어들고 있다. 캐주얼 의류 전문업체인 리바이스는 최근 필립스와의 공동 연구를 통해 휴대폰과 MP3 플레이어를 내장한 스마트섬유 소재의 캐주얼 재킷을 선보였다.

◆코오롱,아라미드 투자 확대

국내 화섬기업들도 2000년 이후 신섬유 등 산업소재 투자 확대에 나서고 있다. 범용 섬유시장에서 저가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중국과 더 이상 경쟁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 · 일 합작기업인 도레이새한은 섬유 기술 노하우를 토대로 2002년 액정표시장치(LCD) 필름시장에 진출,회사 주력사업을 신섬유 기술을 활용한 정보소재로 전환했다.

슈퍼섬유 분야에선 국내 기업 중 코오롱이 가장 앞선 기술력을 갖고 있다. 1979년부터 개발에 착수,2005년 세계에서 세 번째로 아라미드를 선보인 이 회사는 연간 2000t인 생산 규모를 내년 말까지 8000t으로 늘릴 계획이다. 이 규모는 세계 1위인 듀폰(2만5000t) 생산량의 3분의 1 수준이다. 휴비스는 옥수수와 코코넛을 원료로 한 친환경 섬유를 개발하고 스포츠 의류업체를 대상으로 마케팅에 나서고 있다. 문기용 한국섬유산업연합회 기술지원팀장은 "슈퍼 · 나노 · 스마트 · 친환경 섬유 등 어느 한 분야에 투자를 집중하기보다는 각 분야에 골고루 국내 업체들의 참여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정호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