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국내 최대 화섬기업인 휴비스의 경영기획팀에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겼다. 작년 말 개발한 친환경 생분해 원사(原絲)인 '인지오'의 판매가 당초 기대만큼 신통치 않았던 것.인지오는 옥수수를 원료로 한 원사로 피부에 직접 접촉해도 아토피와 같은 피부 트러블을 일으키지 않는 게 특징이다. 이런 특성에도 불구하고 인지오를 가져다 원단을 만들어보겠다는 업체들은 좀체 나타나지 않았다.

문제는 염색과 가공(제직)이었다. 범용 폴리에스터 원사가 섭씨 230도 이상에서 염색과 가공이 이뤄진 반면 인지오는 150도를 넘을 경우 녹아버려 후(後)가공이 어려웠던 것.기존 설비와 기술로는 가공이 힘든 탓에 염색 · 가공업체들이 신제품의 우수성을 인정하고도 원단 개발을 꺼렸던 것이다.


◆"뭉치면 산다"

휴비스 경영기획팀은 한국섬유소재연구소에 손을 내밀었다. 막대한 비용을 투자해 개발한 친환경 원사가 시장에서 그대로 사장되는 걸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연구소는 기술력이 뛰어난 경기 북부지역의 7개 제직 · 염색업체를 선정,인지오 원단개발 클러스터(Kovis)를 만들었다. 휴비스와 섬유소재연구소는 원단 개발에 필요한 원사물량과 제품 · 기술 정보 등을 제공하고,7개 업체들은 새로운 가공재를 통해 낮은 온도에서 인지오를 가공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 매진했다.

성과는 6개월 만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휴비스와 염색 · 가공업체들은 인지오를 소재로 한 60여개의 원단 개발에 성공했다. 지난달 열린 신제품 발표회에는 세아상역 신원에벤에셀 형지어패럴 등 30여개 패션브랜드 업체들이 참여,인지오 원단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였다. 이달 초 미국 LA에서 열린 'LA 텍스타일 쇼'에서는 나이키 노스페이스 등 세계적인 스포츠의류 업체 관계자들이 휴비스 부스를 찾아 원단 사용 가능성을 타진했다. 휴비스 관계자는 "가공업체들과의 긴밀한 협력과 정보 교환을 통해 원단 개발의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다"며 "다양한 원단 개발로 향후 인지오 매출도 크게 늘어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휴비스의 사례처럼 섬유업계에도 '컬래버노믹스(Collaboration+Economics · 상생경제학)'가 확대되고 있다. 다양한 신제품 개발과 원가절감을 위해 기획 · 디자인부터 개발 · 생산 · 마케팅까지 각 단계별 섬유업체간 협력이 확산되고 있다. 중국과 동남아 지역의 저가물량 공세에 맞서 차별화된 제품을 개발하고 사업 수익성을 높일 수 있는 생존해법으로 주목받고 있다.

◆정부도 공정별 협력 지원에 적극

섬유업체간 자발적인 협력 이외에 정부 차원의 지원도 진행되고 있다. 지식경제부는 한국섬유산업연합회(섬삼련)와 공동으로 2007년부터 '섬유산업 스트림(공정)간 협력기술개발사업'을 벌이고 있다. 2년 단위로 진행되는 이 사업의 지원규모는 매년 늘어나고 있다.

지원건수는 2007년 10건(74억원)에서 올해 34건(267억원)으로 3배 이상 늘어났다. 지경부 관계자는 "지원 초기에는 섬산련이 중심이 돼 각 공정별 업체들을 맺어주기도 했지만 이제는 각 업체들이 처음부터 짝을 이뤄 지원하고 있다"며 "내년 지원규모가 300억원을 훌쩍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올해 상반기에 연구과정이 끝난 2007년 지원사업에선 파카RGB가 세계 최초로 '나일론 형상 기억섬유'를,우성염직이 섬유 염색가공공정을 기존 9단계에서 6단계로 단축시킨 기술을 각각 개발했다. 지경부는 2007년 지원사업을 통해 2012년까지 총 1390건의 시제품 개발과 444건의 사업화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노희찬 섬산련 회장은 "자금과 기술력이 부족한 영세 섬유업체가 살아남기 위해선 각 공정별 강점을 가진 업체들의 자발적인 협력이 활성화돼야 한다"며 "면방 · 화섬 · 직물 · 염색 · 의류 · 패션 등 각 스트림간 협력사업 지원을 강화하는데 내년 섬산련의 사업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정호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