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에 서울에서 학교를 다닌 이들이라면 여의도광장에서 열리는 김일성 화형식에 동원된 추억이 있을 것이다.

식민지 시기 비행장이었던 이곳은 여의도 개발과 함께 아스팔트로 포장된 5 · 16광장으로 이름과 기능이 바뀌었고,국군의 날 군사퍼레이드와 반공규탄대회 같은 관제행사가 단골로 열렸다.

출석을 부르고 우리들끼리 열심히 떠들다보면 어느새 행사가 다 끝났으니 귀가하란다. 음향시스템이란 것이 열악하기 짝이 없던 시절이라 주최 측에서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탓도 있었지만,행사 자체가 그저 머릿수만 채우고 사진을 찍으면 되는 성질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광장의 이미지가 이렇게 시작됐다. 그래서 최인훈의 소설 《광장》을 읽고도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게 당연했다.

광장의 기원은 유럽이다. 지금은 세계 어느 도시에나 보편적인 현상이 됐지만 본디 유럽의 도시치고 광장이 없는 도시는 없으며,시민의 일상은 이 광장을 중심으로 영위돼 왔다. 그래서 빅토리아시대의 작가 브라우닝은 이렇게 노래했다. '아! 광장에서의 하루,인생에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있을까?'

예컨대 프랑스 툴루즈의 카피톨레광장(Place du Capitole)은 12세기말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를 지녔다. 광장의 시작은 대부분 장터였지만,이곳은 시(市)청사의 넓고 네모난 앞마당으로 이뤄졌다. 광장은 반역행위자와 범법자의 공개처형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물건을 사고파는 장터로 시민이 모이는 공간이었다. 지금도 정기적인 시장이 열리고 있으며 기념행사와 전시회,바자와 정치연설회 장소로 이용된다.

최근 유럽위원회가 '유럽의 광장,유럽을 위한 광장'이라는 연구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광장의 의미를 다시 묻고,문명의 디지털화로 인해 소통의 장소로서 빛바래가는 광장을 어떻게 복원할 것인지 고민해 보는 프로젝트였다. 제법 두툼한 《광장》은 그 연구결과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프로젝트의 책임연구원이자 대표저자인 프랑코 만쿠조 교수(베네치아대학)는 광장이야말로 시민사회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장소라고 정의한다.

이 책의 자랑거리는 광장의 개념을 다룬 1부보다 유럽 각 도시의 광장을 소개한 2부에 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궁전광장을 비롯해 유럽 24개국 60개 광장을 사진 · 지도와 함께 설명해 놓았다. 도시학 관련 전문가가 아니라도 충분히 눈이 즐겁고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재미있는 부분이다.

무엇보다 이 책이 한국에 번역돼 나온 시점을 중시하고 싶다. 2002월드컵 길거리 응원이 계기가 돼 서울시청 분수로터리가 서울광장으로 바뀐 지 15년 만에 서울에는 또 하나의 광장이 열렸다. 광화문광장이다. 조선시대 왕권의 전유물이었던 이곳을 시민에게 되돌려 준다는 의미부여이지만,정작 광화문광장이 열리자 광장의 구조와 쓰임새를 놓고 말들이 많다. 《광장》 저자들의 말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광장은 대중에 의해 정의되는 유일한 물리적 공간이다. 그 공간은 많은 사용가능성으로 채워진다. 광장이 유용하다고 말하는 것은 거기에서 일어나는 공적이고 공동체적인 활동 때문이다. "

우종근 편집위원 rgbac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