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작정 일본 건너가 보따리 장사 '구루구루' 보고 "바로 이거다"
"국무총리 비서한테 드라이기를 팔았는데 돈을 받지 못한다고?"
1978년 유닉스전자의 한 영업사원은 부서장에게 혼쭐이 났다. 사연은 이랬다. 영업사원은 정부 청사에 몰래 잠입했다. 국무총리 여비서에게 달라붙어 드라이기를 내놓았다. 당시는 드라이기가 아주 드문 때.빗처럼 생긴 고데기 겸용 드라이기를 본 여비서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렇지만 값이 비쌌다. 6개월 할부 조건으로 팔았으나 할부금을 받기 위해 정부 청사에 다시 들어가는 게 힘들었다. 할 수 없이 돈을 떼일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1970년대 말 머리를 말리는 헤어드라이기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헤어드라이기를 국내에 본격적으로 들여온 회사가 유닉스전자다. 이 회사는 1978년 수입품을 팔기 시작했다. 1984년엔 자체 드라이기를 개발했다. 이후 음이온 드라이기,원적외선 드라이기를 세계 처음으로 선보이며 세계 드라이기 시장의 강자로 우뚝 섰다. 세계 시장 점유율은 25%.31년 동안 헤어드라이기라는 한우물을 판 결과다.
◆보따리 장사에서 키운 꿈
창업자 이충구 회장(68)은 1977년까지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성균관대(생명공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 호남전기에 입사해 상무 자리까지 올랐다. 그러던 어느날 불현듯 '내 사업을 해 보자'는 욕구에 회사를 그만뒀다. 무작정 일본으로 건너가 국내에 없는 물건을 사다 파는 보따리 장사를 했다. 도쿄 우에노 공원에서 빵과 우유로 점심을 때우며 시장을 훑었다. 그때 눈을 잡아 끈 것이 '구루구루 드라이기'.당시 일본 멋쟁이 직장 여성들 사이에선 최고의 인기 제품이었다.
'바로 이거다' 싶었다. 1978년 자본금 1000만원에 직원 다섯 명으로 회사를 차렸다. 처음엔 제품을 들여와 팔기만 했다. 그러기를 6년.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1984년 일본 사토사가 드라이기 합작 사업을 해 보자는 제의를 했다.
드라이기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모터를 돌려 바람만 나오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바람의 속도가 달라지고 툭하면 모터가 섰다. 실패의 연속이었다. 오기가 생긴 연구원들은 사생활을 반납했다. 회사에서 먹고 자며 오로지 드라이기에만 매달렸다. 드디어 1985년 첫 제품을 만들었다. 일본 샤프로 수출하는 날 이 회장과 직원들은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감격도 잠시.샤프에서 "당장 일본으로 오라"는 호출이 왔다. 부랴부랴 건너가니 불만이 쏟아졌다. "납땜이 엉망이다. 바람의 속도가 일정하지 않다. 포장도 이상하다…."한국에선 잘 돌아가던 드라이기가 어찌된 일인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결국 수출한 3000대 전량을 리콜할 수밖에 없었다. 처절한 패배였다.
◆세계 최초 이온드라이기의 탄생
곧장 원인 분석에 들어갔다.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전압 차이였다. 한국은 110볼트를 쓰는 데 비해 일본은 100볼트를 사용했다. 전압이 다르니 한국에서 멀쩡히 돌아가던 드라이기가 일본에선 제대로 작동할 리 없었다. 다시 작업하기를 2년.유닉스는 마침내 1987년 샤프사에 수출을 재개했다. 이때의 교훈으로 1991년엔 드라이기 기술연구소도 차렸다.
1990년대 들어 일반 가정에서도 드라이기를 사용할 정도로 보편화되면서 또 다른 숙제가 생겼다. 뜨거운 바람에 머릿결이 상한다는 소비자들의 원성이 쏟아졌다. '머릿결이 상하지 않는 바람을 만들 수는 없을까'란 고민이 이어졌다. 1992년 음이온 건강기기 바람이 일자 연구원 중 하나가 음이온이 나오는 드라이기를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다.
인체에 유익한 음이온을 만들어 모발 수분을 보호해 주면 될 것이란 생각에 연구를 시작했다. 그로부터 2년 뒤.연구소 직원 10명의 힘으로 음이온 드라이기(UN 1330)를 만들어 냈다. 세계 최초였다. 머릿결을 보호해 주는 드라이기는 입소문을 타고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해외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유닉스전자는 음이온 드라이기로 대박을 터뜨려 출시 1년 만에 전체 시장의 60%를 휩쓸었다. 그 이후로도 원적외선 드라이기 등을 개발하며 드라이기 명가(名家)로 떠올랐다. 지금은 각 나라별 특징에 맞는 250여개 모델의 드라이기를 팔고 있다.
◆패리스 힐튼도 반한 한우물의 힘
지난해 초 유닉스전자의 박인성 사장실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미국 10대들의 패션 아이콘으로 불리는 패리스 힐튼 측 인사였다. 제안은 뜻밖이었다. "힐튼과 함께 드라이기를 만들어 보자"는 것.곧바로 힐튼의 집을 방문한 박 사장에게 그녀는 "유닉스 드라이어 성능이 최고"라며 앉은 자리에서 고양이 모양의 디자인을 직접 그려 보였다. 유닉스전자는 곧바로 신제품 개발에 들어갔다. 올해 말께부터 미국 시장에서 힐튼과 유닉스 이름을 함께 단 드라이기를 판매할 예정이다. 박 사장은 "한우물을 파다 보니 복이 저절로 굴러온 셈"이라며 "조만간 미국 콘웨어와 프랑스 파룩스를 제치고 세계 1위에 등극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한국경제신문과 중소기업청이 공동 발굴한 22개 한국형 히든 챔피언들은 유닉스전자처럼 우직하게 한우물을 판 기업이 대부분이다. 반도체와 일반 가전제품에 들어가는 황금 동선을 만드는 대창공업은 32년째 황금동선 사업에만 매달려 있다. 가스용기 사업에 몰두해 성공한 엔케이와 컴퓨터 냉각장치 분야에서 독보적인 잘만테크,캐릭터 인형 부문에서 일본의 헬로키티와 맞먹는 반열에 오른 오로라월드도 한우물을 판 대표적인 기업이다.
김현예 기자 yeah@hankyung.com
◆특별취재팀=하영춘 산업부 차장(팀장),손성태 과학벤처중기부 차장,김현예 산업부 기자,임기훈 과학벤처중기부 기자